아버지에 대한 추억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아버지가 가신 지도 벌써 삼십육 년이나 지나갔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차 한 잔 하자.” 하시며 현관에 들어서실 것 같다.

내 기억 속에는 이름난 시인으로서의 아버지보다 우리 가정 안에서 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더 진하게 남아 있다.

육 년 전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였다. 나는 “어머니, 언제가 가장 기쁘셨어요?” 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병마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잔잔하게 웃으시면서 “너의 아버지가 수술실 밖에서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계실 때였다”고 하셨다.

오십 년 전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방 안에 앉게 하고 일일이 껴안고 볼을 만지시고 “아버지 말 잘 듣고 있어.” 하고는 병원으로 가셨다.

세브란스병원에서 목 근처를 가르는 생명을 건 어려운 수술이었다. 어머니는 이 수술로 평생 목둘레에 목걸이처럼 흉터가 있었다.

평상의 생활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수술로 여섯 시간이 흐른 후 겨우 마취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수술실 유리창 밖에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아버지가 서 계신 모습이 첫눈에 보이더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로부터 또 몇 십 년이 지난 뒤까지 어머니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여섯 시간을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수술실 밖에서 동동 발을 구르며 서 있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사셨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아버지 학교 곁에 초등학교가 있어서 아버지는 나를 초등학교에 들여보내고 아버지 학교로 가고 나는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 학교 운동장에서 놀다가 퇴근하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왔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험을 보았다. 백 점을 맞았다.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자, “잘했다, 백 점을 맞으면 빵을 사 주지.” 하시면서 큰 빵 한 개를 사주셨다.

그 주일 세 번의 시험을 모두 백점 맞아 빵을 먹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는 98점을 맞았다. 아버지가 백 점을 맞아야 빵을 사 주신다고 했기에 나는 퇴근하는 아버지 곁에 서지 못하고 그 뒤에 떨어져서 졸졸 따라 집으로 갔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98점을 맞아 아버지 뒤를 따라갔다.

시내 한복판을 지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상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뒤를 돌아보시면서 “왜 뒤에 따라오니?” 하셨다. “98점을 맞았어요.” 하였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많은 길 한쪽에서 나를 껴안고 앉으셔서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그렇게 말했니? 잘못했다. 98점 맞아도 내 아들, 백 점 맞아도 내 아들이지.”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 후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는 성적표를 보자고 하지 않으셨다. 학기가 끝나 성적표를 어머니에게 내밀면 어머니는 아버지 방으로 나를 데려갔고 아버지는 딱 한 마디 “잘했나?” 하고 물으셨다. 내가 “잘했어요.”하고 대답하면 아버지는 “그래, 더 잘해라.” 하셨고 “못했어요.” 하면 “다음에 잘하면 되지.” 하셨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쯤 나는 오히려 성적표를 내미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성적표보다 아들의 말을 믿으셨다.

내 아버지에 관한 추억은 어머니의 병실 앞에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여섯 시간을 서 계시던 시인이셨고, 평생 성적표를 보지 않고 아들의 말을 믿던 선량한 마음의 아버지였다. 너무 마음이 비단 같아 얼마나 사시기에 힘이 드셨을까.

이제야 겨우 알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어깨에 손을 얹으시고 “힘들지?” 하고 다가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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