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를 그린 그림 / 존 버거
로스티아가 스튜디오로 나를 초대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스튜디오를 가지게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맑은 날이면 파리 북쪽 어딘가에 있는 뼈대만 남은 헛간에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파리 시가 배정해 준 새 스튜디오는 샤트네 말라브리에 있었다. 그는 1954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초, 그가 밤에 생 미셀 대로에서 크레이프 과자를 팔고 있을 때 우리는 처음 만났다. 프랑스를 다뉴브 강을 생각나게 하는 악센트로 발음했는데 오랫동안 군에 복무하다가 갓 제대한 사람처럼 보였다. 자유가 되어서 기뻐요. 이제 혼자가 됐어요. 장교 같은 것 아니죠, 이젠 상병도 아니죠. 이젠 민간인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죠.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체코군은 물론 어떤 군대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성장과 이주, 거부와 생존의 긴 투쟁은 그에게 군 복무와 같았다. 마치 끝없는 기동 연습 같았다. 그 시절 그의 유일한 꿈은 휴가를 얻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손이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쓰레기를 생각나게 했고, 다소 전복적이었으며, 다루기 어렵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았다. 쓰레기 같다는 것은, 험하게 그려졌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그렸다는 점에서 그랬다. 또한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추상적으로 흩뿌려진 물감 속으로 이빨을 드러낸 새끼 염소나 개가 갑자기 드러나기도 하는 것에서 전복적이었다. 다루기 어렵다는 것은 어떤 양식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붉게 칠한 망치 자루처럼, 그림들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부랑아 같은 그 그림들과 그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모자를 뒤로 젖혀 쓰고 마치 무명 작업복 바지를 입은 것처럼 다리를 드러내 놓은 채, 자주 맥주를 마셨다. 말이 통하는 범위 내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얘기를 서로 주고받곤 했다.
당시의 로스티아는 스스로 그럴 만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여자들도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를 서커스 포스터에 나오는 곰 정도로 치부했다. 군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처럼 그 역시 약간 편집증적인 데가 있어서, 이런 상황을 호전시키지 못했다. 때때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듣기 힘든 때도 있었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 헤겔이나 루카치, 파울 클레나 드보르자크 등을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당연한 일로 생각해 그냥 넘겼는데, 그의 몸집은 혹시라도 술집에서 싸움이라도 나면 의지하려고 생각했을 정도로 엄청났고, 눈은 무시무시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 어깨동무를 하고 다리들을 지나 돌아오면서, 우리는 문 하나의 크기가 트럭만 했던 프라하의 목조 관문들을 떠올렸다. 우리 둘 모두에게 그 순간만큼은 센 강이 블타바 강으로 바뀌어 있었다.
샤트네 말라브리의 스튜디오에 도착해 보니, 그의 딸 아드레아가 흔들침대에서 막 잠이 들려 하고 있었다. 곧 두 살이 된다고 했다. 로스티아는 이제 크레이프 장사는 그만두었고 건축 사무실에서 도면 그리는 일을 시간제로 한다. 그와 로렌스의 잠자리는 스튜디오 공간이 내려다보이는 다락에 있었다. 우리는 그 침대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최근에 그린 그림을 봐 달라고 했다. 스튜디오 바닥으로 내려가, 틀을 떼어낸 캔버스를 스테이플러로 벽에 하나씩 하나씩 붙였다. 커다란 그림 하나는 로렌스도 거들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민첩하게 균형 잡힌 그녀의 작은 모습이 서커스에서 곰과 함께 요술 자전거를 타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림에서 이제 부랑아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루기 힘든 것은 여전했지만, 절대적인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제재는 늘 같았다. 전깃줄에 매달려 있는 전구와 전등갓이었다. 그러나 각 캔버스 틀에는 저마다 다른 광대한 풍경들이 그 전등 불빛 아래 드러나 있었다. 어떤 지역들의 풍경? 중부 유럽도, 프랑스도, 켈트 지방도 아니었다. 지표면 어딘가의 한 자락을 두 개, 세 개, 혹은 네 개의 전구가 마치 한 가족처럼 비추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뛰어난 것임을 나는 확실하게 일게 되었고 더 깊이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내가 영어로 글을 쓰는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비평가 중의 하나라는(혹은 하나였다는) 신문 기사를 가끔 본다. 하지만 파리 또는 다른 어느 곳에서나, 내가 아는 미술품 거래상은 한 사람도 없다. 전무하다.
나나 로스티아가 미술품 전문 거래소의 고위직과 마주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연히 실제 그런 사람과 만나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를 어떤 시골 서커스단에서 온 사람들 정도로 바라볼 것이다. 나는 이 그림들이 액자에 넣고, 전시하고, 팔리고, 집에 걸어둘 만한 그림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쪽에서 내 능력은 전무했다.
로스티아가 이런 내 생각을 멈추게 한다. 왜 그래요? 저 어두운 그림이 맘에 안 들어요?
안드레아를 위해 한 잔 할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괴로운 좌절감은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저 맹렬하게 그려진 캔버스가, 그 그림 자체가 지닌 위엄만으로 세상에 내보이는 것을 보고 싶었다.
우리는 물감을 만들어서 쓰면 튜브로 사는 것보다 얼마나 싸게 먹히는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로스티아는 오일과 템페라를 따로 마련해 썼다. 카드뮴 옐로 깡통을 들어 보였다. 그러면서 아마씨 기름이 든 병을 열더니 내게 한 모금 마셔 보라는 듯이 건네주었다. 먹으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이 사람은 알까?
아마씨 기름의 냄새가 있었다. 처음으로 유화 물감 한 상자와 연습장 크기만 한 팔레트를 가지게 되었던 때였다. 물감이 담긴 뷰브들은 먼 나라에서 온 꿈 같은 이름을 달고 있었다. 인디언 래드, 나폴리 옐로, 짙은 엄버, 원색 시에나, 그리고 눈보라에 날리는 눈송이를 연상시키던, 그 신비한 이름의 플레이크 화이트.
그 기름(창유리 접합제를 섞을 때 쓰이기도 하는) 냄새는 나를 반세기 전의 약속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또 그릴 것, 한 평생 매일 그릴 것, 죽을 때까지 다른 것 말고 그림만 생각할 것이라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