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태우기 / 무라카미 하루키
일반적으로 말해서 소설가라는 것은 비교적 이상한(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연연해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해도 좋을지 모른다. 때로는 별것도 아닌 일에 대해서 궁금해 미칠려고 한다.
예를 들면 1970년 무렵에 우먼 리브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여성 해방을 주장했는데, 그 메시지의 일환으로서 브래지어를 태운 일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광장에 모여 기세를 올렸고 타오르는 장작불더미 속에 모조리 브래지어를 던져 넣었다. ‘이런 것이 여성을 사회적으로 속박하고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 그녀들의 주장이었다. 신문기자들은 그 사진을 찍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것은 뭐 그것대로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남자여서 브래지어가 물리적인 관점에서 어느 정도 몸을 속박하는지 전혀 실감할 수 없지만, 주장이 있어 태워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태워 버리면 될 것이다. 그것에 불평을 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은 그것이 새 브래지어였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 사용하던 브래지어였는가 하는 점이다. 그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는 궁금해서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일 정도는 아니지만, 의문부호가 나의 등 어딘가에 옅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있다.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는 신문에 일일이 보도되지 않기 때문에(안 쓰겠지만), 좀처럼 진실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 어느 정도 쓰던 것을 태웠겠지. 새것을 태우는 것은 좀 아까운 일이 아닐까. 여자들이 그런 낭비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불에 탄 브래지어가 불쌍하다. 브래지어는 브래지어 나름대로 그때까지 열심히 맡은 바 직무를 다하며 기특하게(아마도) 살아 왔을 텐데, 갑자기 옷장 서랍에서 끌어내어져 구원받을 가치도 없는 극악무도한 인간처럼, 존재 의의 그 자체를 부정당하고 무시당한 뒤에,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타오르는 불더미 속에 던져졌으니, 아무래도 이건 너무하다. 브래지어와 혈연관계 같은 것은 물론 없지만, 나도 모르게 동정이 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는데, 왜 그들이 브래지어만 태우고 거들은 태우지 않았을까? 브래지어가 속박하는 것이라면, 거들 역시 비슷할 정도로 (혹은 더 단단히) 속박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거들은 태우지 않고, 하이힐도 마스카라도 태우지 않고 브래지어만 태웠다. 아마 무엇인가 역사적 굴곡의 상징이 되어서, 닥터 지바고가 운명의 어두운 회랑을 거닐지 않으면 안 되었듯이, 브래지어는 뜻밖의 비련에 휩쓸리게 된 것 같다. 불쌍하다. 어찌 되었건, 나도 ‘무엇인가의 상징’ 같은 것만은 되고 싶지 않다. 정말로.
뭐, 30년 전에 태워진 브래지어 같은 것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고찰해보았자 소용없겠지만, 나는 또 그 생각을 하고 앉아 있다. 한가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