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 이정림
그 곳은 버려진 땅처럼 보인다. 거기에 공원이 들어선다곤 하지만 언제 착공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땅엔 지금 잡초만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누가 갖다 버렸는지 쓰레기까지 흉하게 나뒹굴어 다닌다.
그래도 나는 그 곳을 지나칠 때마다 아름다운 공원을 상상하곤 한다. 바라만 보아도 마음에 부드러움이 와 닿는 연둣빛 잔디, 굽은 가지조차 멋진 조형미를 이루는 크고 작은 나무들, 할 일 없는 노인처럼 마냥 앉아 있고 싶은 비어 있는 벤치, 동산으로 오르듯 좁다란 오솔길로 구불구불 이어져 가는 푹신한 흙길, 그런 공원이 정말 근사하게 만들어진다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저녁때면 꼭 산책을 나가리라.
그런 공원에 빠져서는 안 될 그림은 아기를 데리고 나오는 젊은 부부의 모습일 것이다. 그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그 행복의 기운이 나에게까지 전해 오는 것 같다. 그네들은 삶에 지친 이에게 자신들의 싱싱한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 있음을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 버려진 땅처럼 황폐해 보이던 곳에 언제부터인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변화는 아주 느린 속도로 이루어져 처음에는 잘 인식되지 못했다. 아침에 그 공터를 지나치려면 왠지 모르게 땅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땅이 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는 거기에 식물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지 않겠는가. 그 곳은 군데군데 시멘트로 발라져 있어 불모지(不毛地)나 다름없었는데 조금씩 땅이 맨살을 드러내면서 풀들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풀이 아니었다. 호박 줄기나 고구마 줄기, 들깻잎과 고춧잎, 검은빛이 돌 정도로 실팍한 대파와 제법 수염이 긴 옥수수까지 저마다 싱싱한 생명력을 마음껏 발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땅은 이제 날로 비옥한 밭으로 변해 가고 있다. 밤사이에 누가 역사(役事)나 한 듯이 아침에 보면 곱게 손질한 밭 한 뙈기가 또 생겨나는 것이다. 밭 가장자리는 땅에서 골라낸 돌멩이들로 담처럼 둘러쳐 있어 이 곳은 내 땅이라는 무언의 암시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느 것은 길쭉하게 어느 것은 네모지게 저마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밭들은 지금 은밀하게 씨앗을 품고 있다. 거기에서 어떤 채소가 싹이 틀지 궁금하여 오가며 기웃거려 보지만 밭은 내 조급증을 나무라듯 조용하기만 하다. 조용한 밭은 농부의 기다림과도 같다. 기다림이란 아름다운 순종이지만 농부에게는 경외로운 순명(順命)이지 않던가.
나는 요즘 은근히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그 곳에 공원이 빨리 조성되기를 바라던 내가 정말로 공사를 착공해 그 밭들을 죄다 밀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것이 걱정인 것이다. 아침이면 농부들처럼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밭고랑에 엎드려 돌을 골라내고 흙을 고르는 사람들, 그들은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공원보다 야성이 숨쉬는 이 밭들을 더욱 사랑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햇살이 뜨거워지기 전, 자신들이 일군 밭에서 잡풀을 뽑고 채소를 솎는 모습을 볼 적마다 사람들은 왜 그다지 땅에 애정을 느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정녕 애정일까 아니면 욕심일까. 처음에는 그냥 버려진 땅이 아까워 밭을 일구어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거기에다 씨앗을 뿌리면서 정성스런 손길이 거둘 수 있는 정직한 소출(所出)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어머니 같은 대지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농부들에게 일깨워 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땅에 대한 애정, 그것은 욕심이 아니라 어쩌면 시원(始原)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자연에의 귀환(歸還),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인간들의 운명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 운명이 우리를 땅에 굴종시키고 나중에는 소유가 그 굴종을 넘어서는 날이 온다 해도 마지막으로 소용되는 것은 단 한 평일 뿐, 그 한 평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욕심이란 없다. 땅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비로소 우리의 지친 육신을 자신의 품에 안아 들이는 것이다.
오늘 아침, 빈터에는 또 하나의 밭이 생겨났다. 다른 밭에서는 벌써 수확을 하는데 그 밭 주인은 이제서야 소박한 기도와 함께 씨를 뿌렸을 것이다. 그러나 대지는 그 기도까지 가납하여 지성으로 싹을 틔우리라. 늦된 자식도 내치지 않는 어머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