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강아지와 아버지의 밤배 / 정호경
초등학교 때를 제외한 중고 시절을 비롯해 대학을 마칠 때까지 객지에서의 하숙생활 때문에 나는 부모님과 함께 따뜻한 정을 나누며 한 지붕 아래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 결혼을 해서 결혼 후에는 직장 관계로 다른 지방으로 멀리 떨어져나가 생활을 해야 했으므로 그로부터 시작한 객지생활 때문에 평생 부모님과는 한집에서 생활할 기회가 없어서 부모님의 정과 사랑의 품이라면, 초등학교 때의 어린 시절과 결혼 직전의 한동안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는 경남 하동군 진교면의 조그마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그때는 일제 때여서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해방이 되었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의 생활이란 우리 동네 꼬마들이거나 혹은 이웃의 일본인 내 또래 꼬마들과의 생활이 전부여서 일본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생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더러 있었다. 우리 집 바로 곁에 일본인 소유의 가지, 오이 밭이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맨입으로 먹기 좋은 것들이어서 밤이 되면, 우리 동네 꼬마들의 단골 습격 장소였으나 그것도 너무 잦아 흥이 나지 않아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모험을 찾아 어느 가을 저녁 무렵에 이웃의 꼬마 친구와 함께 일본인의 감나무 밭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단감을 서너 개씩 따가지고 호주머니에 넣어 나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바싹 마른 일본인 주인할머니가 울타리 밖에 와서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나는 놀라 그 자리에서 감을 냅다 던져버리고 그 길로 집 앞 논길을 따라 한없이 도망갔지만, 내 친구 꼬마 녀석은 그 일본인 주인할머니한테 그 자리에서 붙들려 도망친 놈은 누구냐고 물었던지 바로 앞의 우리 집을 홀랑 불어버린 것이다. 도망친 지 한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겁에 질린 공포감을 안고 조심조심 집에 들어가니 이미 아버지는 회초리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어머니가 아침마다 우리 집 꼬마들의 점심도시락 반찬을 만들기 위해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은 명태처럼 아버지 앞에 엎드려 장단지가 터지도록 두들겨 맞았다. 나의 아버지는 그 당시 이 마을의 유지였기 때문에 일본인할머니에게서 체면 손상을 당했다는 것이 화가 난 이유였다. 그 뒷날 아침 나는 아버지한테 오늘 학교 미술시간에 쓸 도화지 살 돈을 얻어야 하는데, 무서워서 옆에 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닷새 만에 돌아오는 시골 오일장날이면, 큰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으로 나간다. 한두 시간 뒤에 집으로 돌아오는 어머니의 장바구니 속에는 파릇한 산채를 비롯하여 싱싱한 가지며 호박 고구마줄기 깻잎 그리고 낙지 바지락 등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어떤 때는 주먹만 한 복슬강아지도 이런 반찬거리들의 한 쪽에 웅크린 채 엎드려 있었다. 나는 개가 아닌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가끔씩 사서 어머니의 장바구니에 담아오곤 했는데, 강아지가 자라서 짖는 소리가 커지면, 그만 이웃집에 줘버리고는 다시 새 강아지를 사오곤 하던 어머니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머니가 사다준 강아지는 어렸을 적부터 동구 밖 붕어낚시터로 가는, 내 유일한 길동무였으니 지금 나의 이 보잘 것 없는 서정수필이나마 쓸 수 있도록 문학적 정서를 길러준 것은 어머니의 장바구니에 담겨온 강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연유로 하여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정이 깃든 내 고향의 복슬강아지를 생각하고 또한 그런 향토적 정서가 담긴 한국문학 작품, 예컨대 김유정의 「동백꽃」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오영수의 「남이와 엿장수」 등의 단편소설을 지금도 생각이 나면 다시 찾아 읽곤 한다.
나의 아버지는 장사를 해서 돈 버는 데만 열중할 뿐, 가정교육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번번이 외지에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에 며칠이고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볼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장사에는 머리 회전이 빨랐으며, 그에 따라 포부도 커서 해방 직후에는 좀 더 큰 상업도시로 옮아갈 준비가 다 돼 있었는데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만 방향을 돌리게 된 곳이 다름 아닌 순천을 거친 여수이니 사람의 야릇한 운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6·25동란 직후여서 병역문제가 혼란스러워 2개월 만에 한 번씩은 소집영장이 집으로 날아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경찰서에 가서 대학생 신분증을 내보이고는 간신히 풀려나오곤 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학생신분증만으로는 통하지 않고, 병역연기신청서에 대학재학증명서를 첨부하여 경찰서 병사계에 제출해야 했다. 어느 날 또 집으로 날아든 나의 입영통지서를 받은 아버지는 수시로 당하는 일이었지만, 마음이 불안했던지 부산 서대신동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에서 내려온 우리의 천막촌 피난대학으로 찾아와서 구내방송을 통해 나를 찾았다. 나는 깜짝 놀라 당장 사무처로 달려갔더니 아버지가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무처 직원은 국장님이 출장 중이어서 중요서류상자 안에 들어 있는 대학교 직인을 꺼낼 수가 없으며, 오늘은 토요일이니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표정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여유롭게 구수한 옛날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그 옛날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사무처 직원은 그만 감동을 했는지 벌떡 일어나 도구 상자를 뒤적이더니 찾아낸 망치와 펜치로 서류상자의 자물쇠를 뜯어 네모로 된 대학교 직인을 내 재학증명서에 쿵 찍어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의 저 능란하고 구수한 화술에 우리는 평소에 수없이 들은 이야기이지만, 사무처 직원은 처음이니 그만 꼴딱 넘어가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나는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얼른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버지와 나는 여객선 터미널에 가서 여수행 밤배에 올랐다. 저녁밥 때는 조금 일렀지만, 배에서 파는, 뜨끈한 해장국을 사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 아버지와 단 둘이 머리를 맞대고 엎드려 코를 훌쩍이며 밥을 먹기는 난생 처음이다. 뱃머리 쪽에서 뱃고동이 길게 울리더니 여수까지 어두운 밤을 네 시간이나 걸리는 밤배는 쿵쿵쿵 엔진소리를 내며 선창을 빠져나갔다. 아버지는 당일 왕복하는 뱃길이 피곤했던지 삼등 선실 벽에 비스듬히 기댄 채 졸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 지쳐서 조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선실 밖으로 나와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가을 밤하늘의 달빛이 환했다. 밤배의 뱃머리에 부딪쳐 부서지는 파도는 초가을의 밤하늘에 싸라기처럼 하얗게 부서져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