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가 서 있는 집 / 정호경
나에게 집을 옮긴다는 일은 언제나 별 것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무슨 일이건 불쑥 겁 없이 잘 저질렀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여수로 내려갈 때도 이젠 한평생의 교직에서 퇴직을 했으니 아무것에도 구애받을 일이 없으니 남쪽 바다에 가서 낚시나 실컷 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보니 생각과는 달랐다. 나는 원래 몸이 약골인 데다 아버지에게로 시집오기 전 버스가 하루에 한 번밖에는 들어오지 않는 벽촌 출신인 나의 어머니를 닮은 멀미 선수이어서 조금만 파도가 일어도 창자가 뒤집히면서 순식간에 얼굴은 탱자 색깔로 변해버리니 평소에 볼그레한 사과 색깔을 자랑하던 내 안색은 순식간에 무색해지고 만다. 그래서 한바다의 어장에서 하는 배낚시를 포기하고 육지에서의 방파제防波堤 낚시로 장소가 바뀌었다. 선상船上낚시보다는 피로감이 조금 덜하기는 했어도 자정이 지난 한밤중에 힘 좋은 감성돔과의 힘겨루기를 하는 맛을 보기 위해 깊은 밤의 그 시간대까지를 기다리기란 애당초에 내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낚시가 아니라 고역이었다. 그렇다고 애당초에 바다낚시만을 위한 여수로의 직행이 아니고 보면, 나의 소망이 전혀 허탕으로 돌아간 것만은 아니었다. 바다낚시는 제대로 즐기진 못했지만, 거의 매일 푸르고 아름다운 자연과 만나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즐기는 동안에 몸에 소금간이 잘 되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그리고 무겁기만 한 동전이 아닌 황토색 지폐에 대한 욕심도 많이 줄어들어 내 인생이 겪는 구수하고 따뜻한 수필을 틈틈이 써서 여러 권의 수필집을 묶어낼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나에게는 만년晩年의 대단한 수확으로 생각되었다.
여수는 엑스포 이후 전망 좋은 바닷가로 새로운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기존 아파트는 지은 지가 오래된 건물들이어서 우리나라에서 집값이 가장 싼 곳이 여수라는 소문도 나돌았으며, 거기에다 인심 좋고, 육해산물의 먹을거리도 많으니 애당초에 밑천이 얄팍한 서민들이나 연로年老한 퇴직자들이 살기에는 가장 편하고 좋은 낙원이라는 평의 어촌이었다. 하지만 나는 집값의 높고 낮은 것에는 애당초에 관심도 흥미도 없었기에 하는 일마다 금전적 손해를 보고 나서니 집사람이나 자식들의 나에 대한 충고와 비꼼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만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경제에 대해 나는 태생적으로 깜깜해 관심이 없고 보니 우리 가족에 대해 어떠한 나의 궤변도 통하지 않는, 무능한 허수아비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예컨대 번잡한 서울에서 별안간 남행을 결심하게 됐을 때에도 앞으로의 생계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이 불쑥 탈출했어도 20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내 나름의 생활철학으로 한 때도 굶지 않고 여유롭게 수필도 쓰며, 이 고장에 정을 붙여 아무런 사고 없이 지금껏 살아왔으니 나도 당당하게 할 말은 있지 않은가 싶었다.
이런 여수를 집사람의 부득이한 건강 때문에 자식들이 살고 있는, 그리고 크고 작은 병원들이 집 주변에 인접해 있는 ‘분당’으로 내 집을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 나에게 맨 먼저 벅찬 등짐으로 들이닥친 것은 방안 가득 쌓여 있는 수천 권의 책 처분 문제였다. 왜냐 하면 앞으로는 이토록 많은 책을 쌓아놓을 만한 크고 널찍한 집으로 이사를 할 경제적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어른이나 젊은이나 도통 책과는 거리가 멀고, 먹고 즐기기만 하고 있으니 책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 서점 상인들은 생계를 꾸려나갈 엄두를 낼 수 없다니 하는 말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여수시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내 책 전부를 인수하여 한쪽 구석에 ‘정호경 문고’를 만들어주겠다는 말에 나는 큰 걱정거리를 덜게 되어 안도했다. 화제의 앞뒤 순서가 바뀌기는 했지만, 집을 옮기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집을 마련해야 할 돈이었다. 너무나도 비싼 분당의 집값이었다. 내가 20년을 살아온 이곳 여수의 집값을 알아보니 분당의 집 매매가賣買價가 아닌, 전세 값의 3분의 1도 안 되니 앞으로의 일이 난감했다. 하지만 연로한 부모의 이 딱한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자식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것도 내 집이 아닌 셋집으로 옮겨 들게 된 것이다. 하기야 셋집이라고 하면, 젊어서부터 숱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이제는 이삿짐 싸는 일이 나에게는 체질화되어 남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몰염치가 돼버렸다. 대학을 나와 교직생활의 맨 처음 부임지인 경남 진주에서의 교편생활 8년 동안에 나는 이제 막 시작한 신혼생활임에도 젊음만을 자랑 삼아 셋집을 여덟 번이나 바꾸어 옮겨야 했으니 경사스럽게도 매년 한 번씩 이삿짐을 싼 셈이다. 이제 막 시작한 햇병아리 살림의 새파란, 신부였던 아내는 그 당시 나날의 생활이 힘들고 서러워서 남몰래 돌아앉아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눈두덩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 간신히 울음을 참아냈다는 아내의 후문後聞은 새삼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는 지난 9월 초 내가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애환哀歡을 함께한, 많은 책들과 가구들을 버리고 정든 여수를 떠났다. 오랜 세월 정을 붙이고 살아온 여수를 떠나, 종일 먼 길을 가야 하는 연로한 아비의 운전이 염려됐든지 분당에서 일부러 여수까지 내려온 아들이 운전하는 승용차의 차창 너머로 그 동안 고마웠던 여수의 따뜻한 정에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감사의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삿짐을 가득 실은 대형 화물차가 출발하는 오전 열한 시경에 나도 뒤따라 승용차로 떠나는 여수의 푸른 바다 위에는 갈매기 한 마리 날고 있지 않았다. 이것들은 이 고장을 버리고 떠나는 무심한 사람의 서글픈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가. 나는 여수의 수필 동인들이나 혹은 수필 제자들의 그 누구에게도 이곳을 언제 떠난다는 한 마디 귓속말도 없이 이곳을 남몰래 떠났다. 누가 됐건 만남은 반갑고 기쁜 일이지만, 오랜 세월 정을 붙이고 살아오던 이 고장 친구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난다는 것은 이 고장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너무나도 매정스러운 도피 행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나는 끝내 입을 다문 채 이곳을 떠났다. 부푼 꿈을 안고 찾아온 여수에의 애정과 한편으로는 살아오는 동안에 수필 동인들이나 혹은 수필 제자들과의 일상생활에서 서운했던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떠나는 승용차의 차창을 통해 그 동안의 즐겁고 재미있었던 여수생활에 대해 고마웠다는 말만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서 나는 정든 여수 시가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음속으로 계속 손을 흔들어주었다.
오후에 도착하여 우리 노부부가 들어가서 살 이곳 분당의 숲속 빌라촌은 낯선 정적靜寂에 잠겨 있었다.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던 이곳의 우리 가족은 마치 외국에서 오랫동안 유랑생활을 하다 돌아온, 이방인을 대하는 듯한 서먹함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먼 길의 피로에 지친 노부모를 맞이해 주었다. 풀어놓은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어수선하고 피곤했던 밤을 새운 나는 뒷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바로 창문 앞의 뜰에 볼그레하게 익은 대추 열매가 조랑조랑 매달린, 시골 집 앞마당의 감나무보다 더 큰 대추나무가 내 정겨운 가족인 양 반갑게 다가왔다. 나는 문득 어린 시절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 듯한 착각에 콧등이 시큰했으며 또한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감동으로 남지 아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