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에는 자력이 있다 / 유병근
잿빛으로 우중충한 하늘이 무거워 보인다. 무슨 사건이라도 금방 터질 것 같다, 전에도 잿빛 하늘이 없었던 바는 물론 아니다. 그때는 비가 오거나 눈이 왔다. 그것은 잿빛의 알갱이 같았다. 푸른 빛깔만이 하늘의 몫이 아니라고 알갱이는 떨어지면서 수군대는 듯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에 달라붙은 잿빛 하늘을 다시 본다. 멀리 뜬 바다가 하늘을 앞세우고 유리창에 바짝 달라붙어 있다. 바다 또한 잿빛이다. 바다와 하늘의 동심일체를 보다가 나는 깨닫는다. 그것은 근심에 가득 찬 정체불명의 정물화 아닌가 하고.
잿빛은 본래 움직이지 않는 빛깔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 푸른빛을 띠고 있을 때는 구름의 발걸음이 빨랐다. 바다도 예외는 아니어서 배들이 금방 이쪽 연안에서 저쪽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작은 배들이 그냥 그 자리에 종일 숨도 안 쉬고 있는 듯하다. 하기야 나도 꼼짝 안 하고 거실에서 종일 꾸물락거리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정지된 상태에서는 머지않아 심상치 않은 일이 필시 터질 것이란 짐작이 간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엘니뇨 기상현상이라는 것이 갑작스레 바다를 뒤엎을지도 모른다. 그런 음모를 꾸미느라고 하늘과 바다가 잿빛으로 종일 꿍꿍이속을 앓고 있겠다는 어렴풋한 짐작이나 한다. 정중동(靜中動)이라고 하지 않던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을 나는 떠올린다.
바다를 너무 모르고 살아왔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한다.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으니까 바다를 들먹이면서 괜한 관심을 두는 척한다. 신변의 위급에서 구원받으려고 사람은 하늘을 우러러 빌기도 한다. 전지전능은 하늘에만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런데 고개는 절로 하늘 쪽으로 향한다. 그게 우러른다는 뜻을 갖는다고 할까. 무슨 일인지 바다를 우러른다고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뱃사람이 지나가는 거북의 등을 타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다. 전설 같은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구사일생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것만 같다. 굳이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바다 또한 우러름의 대상이다. 세상을 우러러 어쩌고 할 때 아득히 출렁이는 바다 또한 세상의 한 몫이 아닌가.
어느 광고에 컴퓨터를 알면 돈이 보인다고 했다. 그래 바다를 알면 수필이 보이지 않겠는가고 부지런히 바다에 눈을 판다. 그런데 바다는 잿빛으로 잠겨 더욱 무덤덤하다. 이래서야 수필은커녕 문장 한 줄 나오지 않겠다고 이번엔 하늘에 눈을 판다. 그러나 생각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하기야 천편일률의 무덤덤한 잿빛에서 무엇이 나오겠는가고 나는 도로 자리에 앉는다.
문학이랍시고 지금까지 끼적인 내 글 또한 천편일률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나는 나름대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틀을 완전히 새로 짜맞추고자 글의 앞뒤를 바꾸거나 즐겨 쓰던 낱말을 갈아 치웠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잘못된 성형수술처럼 내 글이 아닌 다름 사람의 글이 들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 낯선 글 앞에서 잃어버린 내 얼굴을 찾아 잘못 씌운 덧칠을 제거하느라고 또 애를 먹었다. 글이 내 잔꾀를 먼저 알고 나를 따돌리지 않았겠는가.
대상을 바로 알면 글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한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상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달랐다. 차 한 잔을 하고 보면 대상은 아까와는 다른 내용을 은근히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 대상의 천변만화 가운데서 어느 한 각도만이라도 곡진하게 찍어내고자 사진작가처럼 부지런을 떨기도 했다.
하늘과 바다를 차지한 잿빛은 알고 보면 침묵이란 입술이 꽉 들앉아 일체부동, 일체무언의 교리를 묵언으로 설하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본 무설당(無說堂)이란 당우도 그랬다. 그곳엔 면벽만으로 자아를 찾아가는 길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래 잿빛 속에서 자아의 깊은 내면세계로 이르는 길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늘과 바다의 잿빛을 보다가 나는 또 무설당을 떠올리며 침묵은 금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다소 어설픈 생각이지만 어설퍼야 한다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북 치고 장구도 쳐야 한다며 어거지를 부렸다. 따지고 보면 북이든 장구든 쇠가죽으로 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니 비슷한 소리를 내는 성질을 갖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수필과 시 또한 북과 장구라는 생각에 끌린다. 다른 점이라면 시는 화자가 따로 있는데 반하여 수필은 작가 스스로가 작품 속의 화자다. 그런데 시의 경우 딱 부러지게 화자가 따로 있는 것만은 아디다. 가끔은 시인 스스로가 화자가 되어 화자가 아닌 척 능청을 떨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시의 화자는 시적 내용에서 책임회피의 수단에 되기도 한다. 수필은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하니 운신의 폭이 자연스레 좁은 편이다. 시가 무에서 유를 만드는 수공이라면 수필은 유에서 다른 유를 만드는 수공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도 수필은 소재의 폭에 제한을 받는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든 수필이든 대상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창조하여 이를 낯설게 장치하려는 뼈를 깎는 구도행이다.
잿빛하늘과 바다에서 내가 배워야 할 덕목이 또 있다. 그것은 자중하고 깊이 생각하는 공부다. 나는 이 공부가 부족하여 때로는 상처를 받고 그 상처로 남을 찌르기도 한다. 부끄러운 일인데 그걸 모르고 버젓이 거리를 싸다니며 무엄하게도 원효대사의 사랑노래,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를 함부로 궁시렁거리기도 했다. 그런 흉내로 세상 깊숙이 들앉은 요석공주를 꾀어내고자 약은 궁리를 했다. 하기야 내 요석공주란 심드렁한 시나 수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당찮은 허욕을 부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되든 안 되든 다른 길은 더 이상 없을 듯하다. 그런 빛으로 물든 하늘과 바다가 그런 나를 요석공주 쪽으로 은근히 떼미는 듯하다. 내 나름대로의 아전인수 격이지만 달리 생각하기는 이미 때가 늦었지 싶다. 그래서 인지 잿빛에는 나를 끌어당기는 자력이 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으려 한다. 잿빛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