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없는 길 / 김진식

 

 

 

 

길을 가고 있다. 계절이 오고 숲이 열리고 새가 운다. 동행의 글벗이 수필의 길을 묻는다. 대답이 마땅하지 않다. 나 또한 이 물음으로 골몰하고 있다. 엉겁결에 길 없는 길이라며 웃었다. 그도 그렇구나하며 따라 웃었다. 말이 되는 것인가 하고 되씹어 본다. 선문답(禪問答)이다.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 속엔 나름대로 길이 있지만 좇는 자가 따라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깊어 가늠하기가 어렵고, 높아서 쳐다보기가 아득하다. 그러나 지름길이 없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것이 문도(文道)가 아니던가.

그래서 읽었다. 온갖 삶과 만날 수 있었다. 희로애락이 그 속에 담겨 있다. 어떤 것은 마음을 움직이고, 어떤 것은 거울이 된다. 제 얼굴을 비쳐보며 견줄 수도 있고 그렇구나 하고 깨칠 수도 있다.

갑자기 바람이 지나가며 속삭인다. 귀 기울이지만 말이 아닌 소리이다. 그런데도 닿는 것이 있다. 자연과 순환이 그렇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하는 것은 뜻으로 닦는 일이다. 축이기 위하여 우물을 파고 밝히기 위하여 등을 단다. ‘길 없는 길이다. 이 길을 위하여 스스로 살피어 비춰보아야 한다. 시원한 물이 고이고 높은 것이 보이도록 밝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냥 흘려보낼 수 없다. 스스로 인생을 그려가며 스스로를 밝히는 작은 등()이라도 하나 달면 어떤가. 그래서 쓰는 것이다.

쓰는 것이야말로 길 없는 길의 고행이다. 재능으로 단번에 닦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교만이다. 쓰고 써도 모자라고 목마르기 일쑤다. 차례가 바뀌면 바로 잡고, 군더더기가 있으면 제거하며, 자리 잡음이 어긋나면 가지런히 한다.

진솔하면서도 격이 있고, 격이 있으면서도 신선하게. 제 얼굴이 아니면 근사해도 가면(假面)이고, 제 생각이 아니면 교묘하고 깊어도 얕은 수작이다. 글은 좋은데 사람이 그렇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닦는 아픔과 외로움을 즐겨야 한다. 아픔이 사랑이 되고, 외로움이 흐뭇함이 될 수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산속 오솔길을 걷고 있다. 숨이 가쁘고 목이 마르다. 쉬어가야지 하고 쉼터를 찾는데 바위가 있고 옹달샘이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시원한 물맛. 목을 축인다. 바람이 지나가고 산새들이 지절댄다. 그때 동행의 길벗이 싱긋 웃으며 길 없는 길을 찾았는가한다.

그는 내 속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다. 글벗을 쳐다보며 그가 웃듯 나도 웃으며 여기 있지 않은가했다. 숲가지 얼비친 하늘을 쳐다보며 무심코 떠오른 것이다. 자연과의 교감이요, 직관이랄까.

오를수록 가파르다. 숨이 가쁘고 땀방울이 맺히지만 오히려 생각은 맑고 가뜬하다. 동행의 글벗이 고맙다. 그가 던지는 화두는 내가 골몰하는 것이다. 거기에 성찰이 있고 관조가 있고 쉼터가 있고 여유가 있고 흐뭇함이 있다. 그래서 읽고 생각하고 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산길을 간다. 정상은 아직도 멀다. 그러나 그 봉우리가 눈에 집힌다. 이마에 눈을 이고 지나던 구름이 봉우리를 감싸며 머흔다. 글벗은 아득한 봉우리를 가리키며 듣는다. ‘저 봉우리에 오를 수 있을까하고 아까처럼 웃지 않는 것이 걸린다. ‘시작도 끝도 없지 않은가하고 내가 웃으며 그의 등을 도닥거렸다. 그의 등은 땀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양사언(楊士彦)의 시조 한 수를 읊는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이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자연은 마음의 경계를 무한대로 넓혀가면서 모든 것을 보여준다. ‘길 없는 길도 물론이다. 닦은 만큼의 정제(精製)된 삶의 초상으로 열매를 달아 준다. 여유 있고 흐뭇하고 얽매임이 없는 그런 열매를 말본 밖에 말이 없구나하고 글벗이 나의 등을 밀어준다.

그와 나는 둘이 아니었다. 드러난 현상만으로 내가 될 수 없다. 현상과 마음이 소통해야 한다. 그래서 글벗과 동행하며 무덤과도 말을 나누고 바람과도 속삭이며 길 없는 길을 찾고 있다. 씹을수록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인생이 그렇고 문도(文道)가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