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풀과 딱풀 / 허효남


  

월말이면 습관처럼 편지를 보낸다. 고작해야 작은 문학회의 월례회 안내장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내게 번거롭고도 소중한 시간을 선물한다. 풀로 회원들의 주소를 하나하나 붙이다 보면 가끔씩은 받는 이의 안부가 궁금해질 때도 있고, 작품을 발표할 사람의 차례에는 새 글에 대한 기대로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도 한다. 끈적끈적한 풀로 봉투를 모두 붙이고 나면 내 마음마저 끈끈하게 동인들 곁에 다가간 것 같아 이 일은 늘 귀찮으면서도 즐겁기 그지없다.


어느 달엔가는 봉투를 붙이다가 풀이 다 되어버린 적도 있다. 슬리퍼를 신고 동네 문구점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하지만, 정작 풀은 사지도 못한 채 오히려 고민에 빠져 버렸다. 신랑각시처럼 나란히 붙은 물풀과 딱풀, 그 중 어느 것을 고를지 갈등이 된 까닭이다. 언제부터인가 뒷마무리가 깔끔한 딱풀이 등장하면서 물풀은 오래된 유물인 양 뒤 안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잘못 누르면 흥청망청 갈지자의 취객이 될 뿐 아니라, 손에 쩍쩍 감기는 추태까지 부린다. 오히려 그런 칠칠맞고 세련되지 못한 느낌 때문인지 나는 이날 물풀을 집어 들었다. 모질지 못하고 무른 데다 수필 공부 한답시고 흐느적흐느적 감정을 흘려대는 꼴이 꼭 나와 닮았다고 여겨져서이다.


물풀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딱풀 같은 사람도 존재한다. 천성이 우유부단해서인지 나는 누구의 부탁을 거절하거나 딱 부러지게 내 의사를 잘 드러내는 데 서툴다. 이런 감정의 흐리멍덩함으로 인해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어쩌면 이 흐리터분함 덕분에 결국 남편과의 만남도 이루어진 것 같다.


매사에 끊고 맺음이 분명한 그이는 연애시절 경기도에서 주말마다 꽃을 사들고 대구로 오곤 했다. 먼 거리를 왕복하는 고마운 마음에 미안함과 호감이 섞여 만남을 이어갔고, 일 년 후에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그와 내가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이가 사들고 온 노란 프리지아처럼 결혼은 모든 것을 화사하게 밝혀 줄 거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물풀 같은 나와 딱풀을 닮은 그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물풀 같은 진밥을 좋아하고 그이는 딱풀 같은 고두밥을 즐긴다. 물컹물컹 씹혀서 부드럽게 잘 넘어가는 죽밥을 내어놓으면, 그는 알갱이가 톡톡 톡 살아있는 밥이 먹고 싶다고 타박을 한다. 계량컵을 들고 부산을 떤 지 서너 달이 지나도 상 위에 진밥만 오르자, 결국 그것 때문에 우리는 다투고 말았다.


물풀처럼 끈적끈적한 인정이 넘쳐흐르는 재래시장을 나는 좋아하지만, 딱풀처럼 잘 정돈되고 깨끗한 대형마트를 그는 더 선호한다. 계절마다 바뀌는 시장의 모습을 내가 넋 잃은 듯 바라보면, 그이는 볼멘소리로 꼭 한 마디씩 초 치는 말을 던지고 만다. 고등어 눈이 이렇게 흐리멍덩해서 어디 사 먹겠느냐, 국내산이라고 할머니들이 내놓은 콩은 모조리 중국산일 거라고 말이다. 그이의 청대로 다음번에는 대형마트에 가 보지만, 두 시간에 걸친 충동구매 끝에 양 손 무겁게 짐을 들고 돌아오자 또다시 말다툼을 하고 말았다.


나는 물풀같이 물크러진 성격 탓에 따지기를 꺼려하지만 그는 딱풀처럼 딱따그르 말싸움도 서슴지 않는다. 식당에서 머리카락이 나오면 그럴 수도 있다며 내가 얼버무리는 데 반해, 그이는 단골식당의 복어찜에서 다른 때보다 고기가 적게 나온 날에는 어김없이 주방장과 다투고야 만다. 하물며 극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학생들을 발견하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주변 사람의 눈총을 한꺼번에 받은 적도 있다.


주말이면 나는 물풀 모양으로 끈질끈질한 이웃들의 모습이 정겨워 어머님과 전국노래자랑을 본다. 반면 그이는 젊은 사람이 뭐 그런 걸 보냐며 한마디 툭 던지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홀로 박자가 딱딱 떨어지는 최신가요 채널을 돌린다. 어머님과 둘이서 끈지근한 트로트를 흥얼거리면, 그는 혼자서 딱따개비 마냥 리듬 빠른 인기가요를 엉덩이춤까지 곁들여 신나게 따라 부른다.


어쩌다 외출을 할 때도 그렇다. 나는 물풀처럼 가는 곳마다 감정을 철철 흘리고 다니고, 딱풀 같은 그이는 딴딴한 표정으로 내 감상이 멎기만을 기다린다. 붕어빵을 보면 나는 호떡 굽는 농아인 부부를 소재로 한 「침묵」이라는 수필이 떠올라 그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지만, 그이는 다른 곳보다 호떡이 비싸다는 한마디 말로 내 입을 막아 놓고서야 직성이 풀린다.


문구점의 물풀과 딱풀은 나란히 붙어있어도 항상 선택되기 위해 자리다툼을 벌인다. 통상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딱풀에게 밀려날까봐 물풀이 향기를 머금는가 하면, 고운 색으로 몸을 물들이고 반짝이를 바를 때도 있다. 이에 뒤질세라 딱풀은 더욱 세련된 디자인으로 겉옷을 갈아입고, 우둔한 물풀보다 자신이 현대적이라며 광고까지 한다. 기득권을 가지기 위해 둘은 가까워도 먼 채로, 또는 멀어도 가까운 채로 늘 거리를 두며 살아간다.


우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물풀은 딱풀이 처음부터 저렇진 않았다며 실망의 감정을 쏟아냈고, 딱풀은 물풀이 계속해서 축축 처진 물풀인 채로 살아가는 게 못마땅하다며 투덜댔다. 물풀은 딱풀이 되기를, 딱풀은 물풀로 살기를 원했기에 둘은 다투고 또 다투었다. 이기지 못하면 도태되어 버린다는 불안감에 기를 쓰고 맞서고, 양보해 버리면 서로의 자리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오기에 악을 내어 달려들었다.


물풀은 액체이고 딱풀은 고체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액체와 고체의 다툼은 늘 칼로 물 베기며, 물로 칼베기에 불과하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흐름을 가진 물풀은 본래 부드럽고 감성적이며, 형태가 있는 딱풀은 천성이 딴딴하고 지적이라는 것도 몰랐다. 늘 곁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물풀 공장과 딱풀 회사에서 납품되어 온 탓에 상대방을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또다시 월례회 편지를 보내는 날이다. 겉봉투에 회원들의 주소를 붙이는 물풀 곁에, 어쩐 일인지 딱풀이 다가와서 봉투 시접을 마무리해 준다. 그간 종잇장처럼 찢어졌던 마음을 물풀과 딱풀이 어루만져 주자 한결 편해지기 시작했다. 또, 그때 처음으로 알 것만 같았다. 물풀과 딱풀은 생김새부터 시작해서 서로가 하나같이 다르다고 여겼지만, 무엇인가를 붙인다는 공통점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흔 아홉 개의 다른 점 가운데도 한 개의 같음이 존재하기에 숱한 허물은 모두 덮어질 수 있는 것인가. 비밀 같은 아흔 아홉 개의 문을 모두 열고 들어가면 그 끝에는 정녕 무엇이 있단 말인가. 오늘 같은 날에는 누군가 내게 그 비밀의 문을 열 수 있는 작은 열쇠라도 던져 주었으면 좋겠다. 물풀과 딱풀이 하나 될 수 있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