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을 쓴다 / 나태주
오래 전, 어떤 여성 작가의 수필집(김수현,「세월」.1999. 샘터사)을 읽다가 짐짓 놀란 적이 있다. 그녀의 수필은 형식만 수필의 옷을 입고 있었지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생애의 여러 가지 장면들을 소재로 하고 있었으며 추억들을 담고 있었다. 글의 길이도 길지 않고 짤막짤막했다. 그런데도 감동이 컸다. 문장이 정확하고 깔끔하기도 했지만 글이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담고 있었기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
실상, 글에서 체험의 문제는 중요하다. 어떤 사람도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제대로 글로 쓸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글은 체험이다'란 말이 있어 왔다. 흔히 체험이란 말은 경험이란 말과 혼용되기 쉽다. 그러나 체험과 경험은 조금은 구별되는 구석이 있다. 두 개의 단어 모두 무언가 몸으로 겪어 보는 것을 의미하지만 경험은 가볍게 습관적으로 해 보는 것을 말하고, 체험은 몸으로 겪어 보는 일이긴 해도 잊히지 않도록 겪어 보는 그 무엇을 말한다. 자동차 바큇자국에 비긴다면, 경험이 아스팔트 길 위에 가볍게 난 바큇자국이라면 체험은 진흙길 위에 깊게 패인 바큇자국과 같다 할 것이다.
흔히들 문학 작품에서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상상력이란 것도 체험의 바탕 위에서 형성된 상상력이어야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체험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상상력이라면 그것은 공허한 상상력일 것이고 끝내는 감동을 상실한 상상력이 될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한 소설가의 소설집을 통째로 읽다 보면 그 내용이나 기법이 엇비슷한 점을 많이 보게 된다. 이것 또한 소설 작품이 소설가의 체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워 그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능력 있는 소설가, 스케일이 큰 소설가일수록 소재나 기법의 외연을 충분히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할 것이다.
수필이나 소설과 같은 산문 형식의 문학 작품도 그러하지만 시 작품은 더욱 자신의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시는 주로 감정을 그 대상으로 다루고 타인의 문제보다는 자신의 문제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시인 자신의 일로 볼 때도 외부의 문제보다는 내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이 시이다. 끝없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것이 시이다. 그것을 우리는 때로 추억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여 체험의 옹이에서 진한 감정의 파장을 퍼 올리는 것이 시이다. 그러므로 시는 더욱 체험에 의존하게 되어있고 시인 자신의 생애를 소재로 삼게 되어 있다. 시야말로 시인에게 감정으로 쓰는 일기일 수밖에 없고 감정의 자서전일 수밖에 없는 문학 장르다.
그래서 나는 그 즈음, '시는 자서전이다'라는 명제 하나를 얻게 되었다. 이를 보다 확대시키면 '문학 작품은 자서전이다'라는 명제가 될 것이다. 왜 진즉 이런 걸 알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과 각성은 타인의 작품을 읽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과연 이 작품은 이 작가의 생애에 어떤 의미를 주는 작품일까? 어떤 체험 아래 이런 작품이 나왔을까? 그런 생각을 앞세우며 작품을 읽다 보면 작품이 보다 환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렇다. 모든 작가들은 전 생애를 통해 자서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후배 시인들에게 '자서전을 쓰는 심정으로 시를 쓰라'고 가끔 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