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바위 / 권남희
개구리보나 한발 늦었을까. 경칩의 들녘에서 뒷다리를 펼치는 개구리보다 더 멀리 뜀뛰기를 하느라 중국 곤명으로 봄 여행을 떠났다. 계절도 봄과 가을만 있으니 제길! 꽃이 만발하고 풍경 아름다운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멀리 떠난다고 그 곳의 봄이 더 특별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겠지만 이곳보다 저곳이 더 상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은 여행 내내 따라 다닌다.
운남성 곤명의 꽃들을 뒤로 하고 구향동굴로 향했다. 오로지 돌만 살아남았다는 듯 돌투성이인 동굴은 입구부터 출구까지 사람들의 발길을 따라 길이 잘 다듬어져 있다. 동굴이 발견 된 지는 몇 년 되지 않으니 오랜 세월동안 보물섬처럼 사람들 손 타지 않고 켜켜이 쌓여있을 것이다. 출구의 300 계단까지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어도 다 볼 수 없어 대충 지나쳐야 했다. 놀라운 일은 바위 덩어리인 동굴 어디에서 물이 솟는지 물줄기가 강을 이루고 성룡이 영화촬영을 했다는 폭포는 쏟아지는 물소리가 장관이었다. 바위와 물소리의 만남은 웅장하여 한참을 듣고 있자니 봄 들녘의 온갖 생명체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 같은 착각이 든다. 동굴의 바위들은 둥글거나 종유석의 고드름 형태부터 선바위 납작바위, 병풍처럼 둘러진 바위, 제단을 닮은 바위, 다랑이논 같은 돌 등 갖가지 모습에 누군가 새겨둔 글부터 암각화까지 볼 수 있다. 바위에는 화석이 된 봄의 말들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봄기운은 바위도 물 기운으로 몽글어지게 하는 것일까. 물을 저장해주는 물통바위(수조)나 물을 융통시켜주는 샘 바위가 봄기운을 활기차게 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그동안 표정이 드러나지 않던 바위들도 혈색이 돌고 있는 듯하다.
북송시대 화가 곽희의 그림 「조춘도」의 봄 바위를 보는 듯하다. 그림 속 몇 그루의 나무는 봄기운을 받아 하늘로 솟구치고 주변을 둘러싼 바위는 구름처럼 뭉글뭉글하다. 늘 변함없어 보이는 바위도 봄에 이르러 고로쇠 수액 같은 눈물을 흘려 한해살이를 시작하는 것이다.
봄 바위의 눈물이라도 얻은 양 봄 한 철 텃밭을 가꾸다 돌과 씨름한 적이 있다. 은퇴한 친구들이 낙향을 시작하고 산등성이 아래 집을 지어 나무와 꽃, 채소를 가꾼다기에 그럴 여건이 안 되는 나는 집 주변 개울가를 찾아냈다. 도랑보다 큰 그곳은 물이 제법 흘러 채소 몇 가지를 심기는 좋았는데 산동네라 그런지 돌이 많았다. 내 책상 3배정도 크기의 텃밭에서 찾아낸 돌로 쌓아올린 탑이 작은 서낭당 형세였다. 어른 종아리 정도 높이에서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캐도 캐도 흙보다 돌이 많고 크기도 각각이라 돌하고 한바탕 놀다 봄이 다가고 말았다. 돌 모양에 맞추어 세우고 눕히고 켜켜이 쌓고 그 봄에 나는 틈나는 대로 돌을 줍고 돌을 들여다보면서 기세 좋았던, 내로라하는 산맥들의 바위였거니 상상하기도 했다. 몇 만년 전 설악산 천불동 골짜기 호랑이 바위나 부처바위, 선비바위 등 한 때 위용을 자랑하고 계절을 쥐락펴락했던 그 많은 바위들이 굴러 굴러 이곳에서 작은 돌로 자족 한 채 봄을 되풀이하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예전에는 이곳도 깊은 산속으로 지나는 길손들이 하나씩 올린 돌탑이 서낭당이 되어 기도를 올리는 곳, 마을을 지켜주며 가족의 행복을 비는 장소로 거듭났을지 모를 일이다. 시간에 따라 새겨진 돌 모양들이 인생처럼 보여진다.
돌에 열중한 봄 그 많은 꽃이 피고 지는 지도 잊고 지냈다.
어느 한해도 꽃을 심지 않고, 꽃을 집안에 들여놓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는데.
꽃타령을 하지 않고도 풍성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이 돌 저 돌 줍고 바라보다 봄기운을 흠뻑 마시고 봄 살아내기를 터득했다.
봄기운은 처음부터 돌에 새겨져 있어 마음만 먹으면 꽃을 피우고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봄 바위를 만나는 일은, 휴일 내내 말 몇 마디 나누지 않아도 같이 식사하며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배우자처럼 답답하지만 의연한 인생 그런 것이리라.
뜻을 새기고 의연하게 품고 기다리다 봄의 정기를 나누어주는 바위의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