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파꽃 박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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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중부 아웅반 근교의 시골병원에서였다엔지오 활동을 하는 의사를 만나러 간 길이었다키 큰 꽃나무들이 기린의 목을 하고서 잿빛 하늘 속으로 고고히 꽃잎을 흩날리고 있었다차례를 기다리는 환자들도 꽃잎처럼 흩어져 있었다.

담벼락 꽃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소녀가 눈에 띄었다열 살이나 되었을까무릎에는 동생인 듯한 여자아기를 안고 있었다두어 살 정도로 보이는 아기는 머리털이 다 빠지고 이마에는 수술 자국인 듯한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온 듯소녀는 진초록 치마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은 교복차림 그대로였다자꾸만 눈길을 주는 소녀에게 씽긋 눈인사를 보냈다소녀도 살짝 웃었다약속시간을 기다리며 소녀에게로 다가가 보았다.

흘레바람이 꽃송이를 흔들었다가지 끝에 달린 꽃송이들이 나무들의 눈망울 같았다커다란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며 사방을 둘러보는 모습이 이방인인 나를 쳐다보는 소녀의 눈동자를 보는 듯했다.

소녀의 어깨 위에도 꽃송이가 내리고 있었다진한 향내가 났다치자 향과 재스민라벤더 향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고갱의 '타히티 여인'들이 머리와 목에 걸고 있는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향내가 느껴지던 꽃이었다태평양 섬나라의 무희들이 춤출 때 머리와 귀에 꽂고 있던 그 꽃이었다손가락으로 꽃을 가리키며 눈을 맞추자 뜻을 알아차린 소녀는 "데어스꾸뻰!"하고 불러 주었다나는 꽃송이를 올려다보며 "데어스꾸뻰!"하고 불러 보았다.

우리말 이름이 궁금했다중국에서는 지단화태국에서는 리리와디필리핀에서는 깔라츄치로미국에서는 풀루메리아러브하와이템플 트리로 부르는 꽃이었다라오스 국민들은 그 꽃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독참파'라는 이름을 지어 나라꽃으로 삼고는 땅에서만 보는 것으로 모자라 하늘에도 심어놓았다국영항공인 라오 항공기의 꼬리날개에도 그 꽃을 새겨두었다니.

나라마다 고유한 이름이 있을 정도로 사랑을 많이 받는 꽃이지만 미국에서처럼 '플루메리아'로 불릴 뿐우리만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또 다른 이름이 있을까 찾다가 그 꽃이 인도사람들이 '챔파꽃'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흥분이 일었다먼 기억 속 그리움을 만났을 때의 감격이라고나 할까.

내가 장난으로 챔파꽃이 되어서는저 나무 높은 가지에 피어바람에 웃으며 흔들리고새로 핀 잎 위에서 춤추고 있다면엄만 나를 알아보실까?/ 엄마는 이렇게 부르실 거야/ "아가야어디 있니?"/ 그럼 난 살짝 웃고는 아무 말도 안 할 거야나는 살며시 꽃잎을 열고엄마가 하는 일을 몰래 보고 있을 거야

이렇게 시작되는 타고르의 시 '챔파꽃'에 나오는 꽃이 '데어스꾸뻰'이라니우리 말 이름이 없어 서운했던 나는 그 꽃을 '챔파'로 이름 지어버렸다.

병원 건물을 훌쩍 넘어 피어난 꽃나무는 가지 끝마다 실한 꽃송이를 달고 있었다잔가지에 눈길이 머물렀다어린 새의 발가락 관절이 떠올랐다먹이를 구하러 떠난 어미 새를 기다리며 가지 위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을 아기 새의 모습이 그려졌다소녀의 치맛자락 아래로 드러난 정강이가 꽃나무의 잔가지처럼 가늘었다앙상한 발목뼈에서 돋아난 발가락도 아기 새의 발 같았다아기 새가 날았을 길과 소녀가 걸었을 길이 나뭇가지 위에서 만나 있는 듯했다.

소녀가 궁금해졌다엄마를 대신해서 동생을 업고 온 것일까그렇다면 엄마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걸까맨발로 얼마를 걸어 왔을까점심은 먹었을까아빠는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나는 입으로는 "챔파챔파!"하고 되뇌고 있었다.

꽃 이름을 부르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챔파'라는 이름 속에는 ''이라는 들숨과 ''라는 날숨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그것은 숨을 가득 모아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꼭 닫아 '!'하고 멈춘 다음한순간에 '!'하고 뱉어서 내는 소리다. ''을 보고 있으면 허공을 딛고 오르는 사다리가 생각나고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건너기 위해 다리를 모으고 있는 새가 떠오른다. ''는 자음 ''이 모음 ''를 만나서 내 속에서 한 번도 발음되어지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원시의 숨을 몸 밖으로 끌어내는 소리다. '!'하고 숨을 뱉는 순간에 심장이 열리고 눈이 환해지는 느낌이 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챔파!"하고 부르면 챔파꽃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챔파!"하고 응답할 것만 같다나의 날숨이 나무에게로 전해져 들숨이 되고나무의 날숨 향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도 한 그루 챔파나무가 될 것 같다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내가 챔파꽃이 되고 챔파꽃이 나로 될 수 있다면최고 향수를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는 꽃모든 만남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샤넬 넘버 파이브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향기로울까.

의사는소녀가 일을 나간 엄마를 대신해서 동생을 업고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을 걸어 병원으로 온다는 말을 전해주었다다섯 살이 되었다는 동생은 심한 뇌신경 장애를 안고 태어났으나 두 달 전에야 후원자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며 완치는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 있었다소녀는 챔파나무 아래를 거닐고 있었다아기는 소녀의 등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소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직?'하고 홉뜬 눈으로 물어보았다소녀는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설핏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다시 '아직도?'하고 다그치듯 미간을 찌푸리자 이번에는 큰 웃음을 보여주었다. '괜찮아요조금만 기다리면 돼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어린 나이에 기다림을 다 배워버린 듯오히려 나를 달래주는 눈망울이 미안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미얀마의 비는 한 번 내리기 시작하면 '후두둑쏟아진다꽃 참고 있었던 눈물이 터지듯챔파 꽃잎도 그렇게 내렸다소녀가 비를 그으며 병원 건물 안으로 달음박질해 들어 왔다맨발에 달라붙은 꽃잎에서 진한 꽃내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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