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과 '새'를 생각하다 / 최원현
설이 내일 모레다. 1월 1일이 지난 지 한 달여이지만 설날이 되어야 진정한 올해가 된다는 생각이다. 그런가 하면 첫눈이 내린다고 좋아한 것이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겨울이 깊어져서 이제 곧 봄, 새 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나 '첫'이라는 말에 유난히 민감한 것 같다. 하지만 세상에 '첫'인 것이 어디 있고, 또 '첫' 아닌 게 어디 있을까. 모두가 자기 편한 대로 구분하는 것이지 않을까.
이른 새벽 교회로 향한다. 하나님께 첫 시간을 드림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미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 갈아입고 신발 신고 집을 나서기까지 만도 그 하루의 '첫'은 수없이 행해진 것이고 지나간 것이 된다. 다만 그것들은 준비과정으로 진정한 드림은 아니라는 것인데 그 또한 내 마음이 정한 것일 뿐 기준이나 규정 같은 건 없다. 그러고 보면 한 해의 시작도 그렇지만 이 하루라는 것의 시작도 어디로부터 볼 것인가, 0시 1초인가, 밝음이 시작되는 그때를 하루의 시작으로 볼 것인가. 하기야 시계 또한 우리가 정한 규칙 속에서의 인정함일 뿐 아닌가. 어떻든 사람들은 그런 구분에서라도 '첫'과 '새'에 매료되고 환호하고 열광한다.
'첫'과 '새'가 풍기는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첫 손자가 태어나던 날 난 참으로 설레었다. 남매를 낳아 키웠지만 그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설렘이다. 내 핏줄의 첫 생명체, 새 생명이라는 느낌은 아기를 보는 순간 감격으로 느껴졌다. 제 어미를 닮은 모습이겠으나 신기하게도 제 어미의 아빠인 내 모습이 먼저 보였다. 눈 모양과 입 모양에서 귀 모양까지, 코는 제 어미와 외할매를 닮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60여 년의 세월 차를 두고 어떻게 나를 닮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첫 손자는 유난히 더 사랑을 많이 받는지도 모르겠다. 닮음이야 둘째나 셋째에도 있는 것이지만 처음이라는 것, 첫이라는 것에서 발견한 닮음의 감동이기에 더 유별났던 것 같다.
내가 첫 해외여행을 한 것은 1989년이었다. 모 카드사가 협력기관 직원을 초청한 것이었는데 괌으로였다. 그때의 설렘도 컸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이었고 거기다 첫 해외여행으로 내 나라를 떠난다는 것이었으니 당연 그에 대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 가서 만났던 바다는 내가 보아서 알고 있던 그런 바다가 아녔다. 끝도 없이 펼쳐지며 경계도 없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바다는 태초 창세기의 그 궁창이었다. 그때의 놀라운 감격과 충격의 바다와 하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새해, 첫 달, 첫 주, 첫날을 지나 새봄도 멀지 않다. 어느 해와 다름없이 매년 맞는 것이건만 그 '첫'과 '새'가 주는 마력에 이끌려 또다시 흥분한다. 어제도 떠올랐을 그 해를 새해 첫 해라며 새롭게 바라보고 어제 만났던 사람인데도 지난해에 겪어야 했던 절망과 분노와 슬픔과 아쉬움 같은 것들은 다 잊게 하시고 이제부터 새로운 해이니 올해에는 평화와 행복과 감사와 아름다움만 넘치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과 기도가 담겨 있다.
그러고 보면 '새'는 반직선이다. 시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또한 그렇다. 직선 속 구간일 터이겠지만 우린 그걸 반직선으로 보면서 그 시작을 '첫'이고 '새'로 본다. 우리 말 '삼세번'이라는 말 또한 그런 '새'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맘에 안 드는 한 번을 버리고 다시 한 번을 '새'나 '첫'으로, 그러나 왠지 미안하니 각기 한 번씩 한 것은 없는 것으로 하고 한 번 더 하는 것을 '첫'으로 한다는 것 아닌가.
인디언들의 기도는 다 이뤄진다고 한다. '새'나 '첫'으로만 끝까지 가면서 이뤄질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끊어 버릴 것은 버리고 그 시작부터를 새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다시 '첫'으로 시도한다. 그게 좀 미안했을까. 그래서 '삼세번'이다. 그쯤에서 합의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것도 편의상 만들어진 규칙이지만 상호 양해가 이뤄지고 그렇게 한 그것에 '새'와 '첫'의 의미를 부여하여 다시 시도한다. 우리는 그렇게 새것을 갖고 새롭게 하고 처음이라며 환호한다.
매일 매일의 하루, 그 하루 속에서 맞이하는 수많은 시간들, 지고 뜨는 해, 모두 새로운 역사 속의 시간이요 사건들이 된다. 사실 오늘 아침은 흘러가버린 시간 속의 어제 아침과는 결코 같을 수 없으니 새 아침이 분명하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이 끊어질 수만 있다면 그 새 아침에 이뤄지는 첫 행위이니 또한 처음이다. 늘 새롭게 첫날을 맞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어떤 만남도 내 눈과 마주쳐야만 첫 만남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나 모르게 지나가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눈에 내 맘에 마주치는 만남으로 시작을 만들려는 노력, 그래서 내가 보고 느끼는 그 '첫'과 '새'에 열광하는 것 아닌가.
새벽 새날 새해 새댁 새신랑신부, 새것 그리고 첫 만남, 첫 직장, 첫 여행, 우리는 그렇게 뭔가 더 새로운 것, 가장 신선하고 신비로운 첫 것을 만들려 하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생각한다. 내일 모레면 설날이다. 진정한 새해다. 아니 새날이라고 했던 그날이 지나갔으니 다시 새날을 갖고 싶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도 새 소망, 새 계획 속에 새해 첫날을 맞을 것이다. 손주들을 위하여 세뱃돈도 준비해야겠다. 새해 들어 받는 첫 돈일 테니 그것도 새 돈을 준비해야겠다. '새'와 '첫'이 주는 감동을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