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 / 김은희
강의를 나가는 경기권의 한 대학교 홈 페이지에 교수초빙 공고가 났다. 그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 것은 겨우 두 학기 째였다. 하지만 홈피에서 구비서류 목록과 이력서 양식을 다운 받았다.
대학교마다 이력서 양식이 다르다. 이 대학이 요구하는 양식에서는 연구 성과와 업적난보다 가족난이 먼저였다. 배우자와 자녀를 써넣는 항목은 아예 없고 대신에 남자의 경우는 친가와 처가, 여자의 경우는 친정과 시댁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서 ‘양가 부모’에 대한 항목이 이력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부모에 대해 ‘구체적으로’라는 단서까지 첨언하여 최종학력, 종교, 직업 등의 난을 채워야 했다. 내 자신의 연구경력, 연구업적은 10편까지만 기재하고 그 이상은 올리지도 말고 업적 물도 수령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연구실적보다는 부모의 학력, 종교, 직업이 중요하게 생각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해지기까지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기도 했고, 아직까지도 우리 아이들을 돌보느라 애쓰시는 친정어머니가 괜히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열심히’ 이력서난들을 채우고 자기 소개서를 쓰고, 연구 계획, 강의계획, 연구 업적 요약서들을 작성하고, 서류들과 연구업적들을 모았다. 러시아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전화를 해서 이 대학에 요구했던 사류중 하나인 박사과정 성적 증명서도 부탁했다. 오빠는 성적 증명서를 바로 보내주었다. 여름방학중인데도 담당자를 쉽게 만났으며 내 서류들을 찾아보더니 나를 기억하고는 볼펜과 과일 등을 기념품으로 챙겨주었다며 반색했다. 친정오빠는 러시아에서 십 년 넘게 살면서 하루에 한 가지 일을 바로 처리하기는 처음이라며 ‘좋은 징조’라고 내게 잘 될 거라는 기대까지 품게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여러 가지로 일이 쉽게 풀리는 것 같았다. 마침 저서도 출간되어서 연구 업적에 추가될 수 있었고, 모든 서류들도 일사불란하게 처리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니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간강사의 죽음이 떠오르기도 했고, 내가 대학 다닐 때 강사를 하던 선배들 중에 아직도 시간강사를 하는 선배의 얼굴이 스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차츰 나를 추스르고 생각해 보니 원서를 준비하는 그 과정 속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세렌디피티….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완전한 우연으로부터 중대한 발견이나 발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플레밍이 배양실험을 하는 도중에 실수로 푸른곰팡이를 혼입한 것이 후에 감염증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을 구해낸 항생물질인 ‘페니실린’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비밀무기에 속했던 초단파를 이용한 전자레인지의 발명이나, 시작은 초강력접착제였으나 우연히 만들게 된 3M사의 포스트 잇 메모지 등, 그 예는 수없이 많다.
이 용어는 원래 ‘실론 섬의 세 왕자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세렌디피티는 실론의 아라비아어이고 지금의 스리랑카를 가리킨다. 실론의 왕에겐 세 왕자가 있었는데,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가정교사들은 후계자 교육의 마지막 과정으로서 보물을 찾아오게끔 세 왕자를 멀리 떠나보내도록 왕에게 권한다. 결국 세 왕자는 길을 떠나게 된다.
세 왕자는 여행 도중에 페르시아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를 지나다가 낙타를 잃어버린 사나이를 만난다. 왕자들이 낙타가 ‘눈이 먼 것’, ‘이가 빠져 없는 것’, ‘다리를 하나 저는 것’까지 다 알아맞히자 사나이는 세 왕자가 낙타를 훔쳐간 것으로 오해하고 황제에게 끌고 간다. 하지만 세 왕자는 낙타를 보지도 못했다고 말한다. 황제는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세 왕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세 왕자가 처형되기로 한 날에 사나이의 낙타가 마을에서 발견되어 왕자들은 누명을 벗게 된다. 황제가 세 왕자에게 보지도 못한 낙타를 어떻게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었느냐고 묻자, 왕자들은 길 양 옆에 나 있는 풀이 유난히 한쪽만 적은 것을 보고 한 쪽 눈이 먼 낙타일 거라 짐작했으면, 먹다 흘린 듯한 풀 중에 제대로 씹히지 않은 풀이 여기저기 눈에 띄어 이가 없는 낙타일 거라 추측했으며, 발굽 자국이 세 개는 또렷한데 한 개는 끌리듯이 나 있어서 다리를 저는 낙타일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황제는 세 왕자의 지혜에 탄복해서 자신의 신하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지만 왕자들은 부왕이 명령한 보물을 찾아 자신들의 여행을 계속하게 된다.
이후 왕자들은 보물을 찾는 것은 결국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페르시아 황제를 만나는데 그는 ‘델리란마’라는 애첩을 잃고 상심하고 있었다. 왕자들은 또 다시 기지를 발휘해 그 여인을 황제에게 찾아주고 많은 보석과 피륙, 진기한 책들을 선물로 받아 고국으로 돌아온다.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많은 선물은 받았지만 부왕이 명령한 보물을 찾지는 못했던 왕자들은 그간의 일화를 왕에게 고하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세 왕자가 보물을 찾는 여행 중에 겪은 경험이 바로 진정한 보물”이라고 말하며 기뻐하게 된다. 이 후 세 왕자는 각기 다른 나라의 왕이 되어 선정을 베풀며 살아간다.
그들이 왕이 되기 위해 보물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찾은 것은 결국 그들이 위기 때마다 발휘했던 지혜와 그 결과로 얻은 값진 경험이었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도 끊임없는 실험이라는 과정의 결과였으며, 그 외의 경우들에서 발견된 다른 모든 ‘세렌디피티’의 예들도 어떤 결과를 얻으려 수없이 노력한 과정이 이루어낸 합당한 결과물들이었다.
내가 공부하고 강의하는 과정에서 그 과정들이 지속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수 있는 어떤 지위를 얻기 위한 노력이 실패로 끝났고,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상심과 의기소침을 겪었다. 하지만 그 노력 자체를 통해서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나는 아직 어떤 보장이라는 결과보다는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이 더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이런 과정들이 노력으로만 끝난다하더라도, 내가 좋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면 이후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은 초연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내 삶이 과정으로서만 끝난다고 하더라도 큰 후회는 없으리라는 생각도 해보며 세렌디피티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