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약 두 봉 / 한동희
수필을 써 온지 어언 20여년이 된다. 그간 세권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다작은 아니지만, 수필을 쓰면서 진을 많이 뺏기 때문에 이제는 그만 수필 곁에서 멀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제대로 문학 대접도 못 받는 수필에 매달려 무얼 어쩌자는 것인가 하는 회의에 젖을 때도 있다. 헌데 한(恨)이 많아 그런가, 바람이 잔뜩 든 고무풍선의 한 곳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불룩 튀어 나오듯, 가슴에 담겨진 사연이 나에게 종주먹을 해댄다. 조금씩 달래주지 않으면 그냥 큰소리를 지르며 터져버리겠다고, 고무풍선 속의 바람처럼 가슴속의 바람이 나를 위협한다. 그러면 이 나이에 가릴 것이 무엇이냐며, 야금야금 속을 드러내 보인다. 살아온 육십여 성상이 그리 긴 것도 아니건만, 이쯤 살아보니 세상 사 너 나 할 것 없이 주름투성인데, 가슴에 안고 한숨 쉴 일도 미소 지을 일도 아니라고, 기쁨도 아픔도 서로 공유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며 혼자서 인생 철학서를 쓰기도 한다. 그리곤 어떻게 벗느냐를 두고 밤새 골머리를 앓는다.
언젠가 누드모델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는 현장에 가 본 적이 있다. 누드그림은 감상한 적이 있지만 실제 모델이 나와 옷을 벗는 장면을 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잔뜩 호기심을 안고 공연장에 들어섰다. 많은 모델들이 차례대로 옷을 벗으며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포즈를 취해 주었고, 관중들도 그들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그림을 감상하듯 영혼이 담긴 육체를 바라본다. 그런데 나는 기대만큼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돌아왔다. 누드모델의 옷 벗는 모습이 너무 쉽게 보여 실망했다.
또다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수필 세미나에서 항간에 물의를 일으킨 모 교수가 수필 강연을 했다. 그는 수필의 표현 방법에 대해 '그냥 시원하게 방뇨하듯 배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는 수필 초년생이 많이 참석했는데, 그들이 수필을 잘못 이해하게 될 까봐 걱정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삶을 구체화시키는 수필문학은 거짓이나 꾸밈없이 진솔하게 자기 자신을 벗어내야 하는 특성에 고민이 있다. 그렇다고 누드모델이 거침없이 가운을 벗어 던지듯, 뱃속의 오물을 시원하게 방뇨하듯 배설할 수는 없다. 수필은 그 사람의 얼굴이기에, 표현기법이나 토씨 하나에도 애정의 손길을 보내야 한다. 수 없이 교정을 거쳐 탈고를 한 후에도 선뜻 발표하지 못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 두 가지의 쓰디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것도 그 경험을 통해 익혀 왔다는 것을 고백한다.
20여 년 전의 일이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천료를 받고 기쁨에 들떠 있는 문단 초년생의 나에게 느닷없이 수필계의 원로 P선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축하한다는 말 대신 내가 천료 받은 수필지에 글 같은 글 실린 것 봤느냐며 말문을 열었다. 실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렇다면 P선생은 자기가 폄훼하는 수필지에 이따금 작품 발표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늘같은 선배 앞에 말대꾸 한 번 못하고, 새싹의 목을 싹둑 잘라내듯 하는 그의 거친 말을 듣고 한동안 마음을 앓아야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수필에 대한 의욕을 상실 할 뻔 했지만, 심기일전하여 반전의 기회로 삼게 되었다.
그 얼마 후, 어느 백일장 행사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P선생과 잠시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는 뜬금없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 번 발표한 작품에 대한 인상을 지우려면 최소한 8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작품 발표에 대한 신중성을 강조한 말이었는데, 나 같은 신인에게는 보약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지난번의 일로 마음이 상해 있는 나는 그 말이 쓴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국내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지성의 대표라고 일컫는 H문학지에 수필을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지면에 욕심이 생겨 다급히 수필 한 편을 보냈다. 그러나 보낸 수필은 '원고 재고'라는 딱지와 함께 되돌아왔다. 그것은 작품에 대한 함량미달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때의 부끄럽고 씁스름한 기분은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제서야 P선생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부족한 글에 대한 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8년을 애쓰지 않게 해준 H문학지의 편집장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되돌아 온 원고를 수개월간 묵혀두고 퇴고를 거듭하여 작품 한 편을 건지니, 그제야 죽을 뻔한 자식을 살린 것 같아 묵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 만약 H문학지에서 내 원고를 그대로 실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현기증이 난다. 지금 글에 대한 신중함으로 밤잠을 설치고, 발표지면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은연중에 배어든 두 봉의 쓴 약 덕분이라 여겨진다. 헌데, 이즈음 약발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염려될 때가 있다. '변함없는 독자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는 나의 고정관념은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이제는 문학도 독자를 찾아 나서는 시대가 되었다. 소극장에서 흥겨운 록음악과 젊은 시인의 토크 쇼, 시를 상징하는 퍼포먼스로 독자와 함께 즐기고, 달리는 열차 안에서 시를 낭송하는 문학전용열차도 생겼다. 독자 곁으로 한 발 다가서려는 지상의 열띤 움직임 못지않게 사이버 세계의 문학 열기도 대단하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문학행사에는 한국 문단의 대표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는 주로 현대문명의 최첨단 기술에 익숙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는 것 같다.
나는 주로 수필 코너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적벽부(赤壁賦)를 쓴 중국 북송 때 시인이며 문장가인 소동파가 '글 한편을 완성하는데 버린 파지가 세 삼태기'라는 말은 그야말로 옛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가속도에 길들여진 다수의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을 하나의 휴식처 삼아 심심하거나 피곤할 때 들어와 생각나는 대로 컴퓨터자판을 두드리는 모양이다. 교정도 하지 않은 글을 모니터에 방뇨하듯 배설하는 사람들, 이곳저곳 사이버 공간을 드나들며 글보다는 인기몰이에 정신없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에게서 앞만 보고 내달리는 현대인의 갈증이 느껴지지만, 속도와 효율성에 밀려 영혼이 결여된 글을 마구 쏟아내는 것은 수필을 얕잡아 본 까닭이리라. 그래도 수필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없는 수염을 만들어 양반 흉내를 내서도 안 되겠지만, 남에게 오물이 튀든 말든 방뇨하듯 배설하는 상놈이 돼서도 안될 것이다. 아무리 자유가 허용된 공간이라 해도 그곳은 공공(公共)의 장이기에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것이다.
글에 대한 신중성을 충고해주던 선배와 함량미달의 글을 되돌려 보낸 잡지사의 편집장이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예나 지금이나 글에 대한 부족함은 여전하지만, 그나마 나를 키운 절반은 그들이 내민 쓴 약 두 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