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잠에서 깨다 / 김정화
창밖에 초록물이 내려앉았다. 며칠간 비를 머금었던 나무들이 가지마다 봄기운을 흔들고 있다. 봄은 숨은 촉의 향기로부터 오고 가을은 마른 잎소리로 깊어간다. 그러기에 잎 자국 속에서 다시 돋는 계절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마음 설렌다.
지난겨울이 끝나갈 무렵, 이른 봄을 만나러 나섰다. 매향의 알싸한 맛에 욕심을 내어 가까운 원동 매화마을로 향했다. 산허리를 휘감으며 풀어내는 순백의 꽃잎이 강변 찬바람을 밀어내고 있었다. 잠시 머문 산자락의 매실 농원에서 어렵사리 매화 모종 한 주를 얻었다. 작은 체구이지만 줄기가 딴딴하고 꽃봉이 제법 맺혀 있었다. 마침 베란다 한켠에 엉거주춤 놓여있는 빈 화분이 생각났다. 머지않아 꽃등을 피워 올릴 것을 생각한 마음에서 먼저 달큰한 바람이 일었다.
하지만 옮긴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시들병에 걸린 양 허청대더니 쪼그라들면서 말라버렸다. 기대했던 꽃불은커녕 꽃심지도 올리지 못했다. 한 줌 흙을 움켜쥐었던 나무는 어쩔 수 없이 창 밖 숲으로 내던져졌다. 봄꽃이 마음에서 지니 온몸의 기운마저 꺾여 버렸다. 잔뿌리를 덜어낸 화분은 속이 휑하게 꺼져 있었다. 푹 파인 모양새가 속앓이한 마음 같기도 하고 외딴 골에 남아있을 스산한 토굴을 떠올리게도 했다.
화분을 선뜻 치울 수가 없었다. 그대로 창 밖 화분틀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나마 매향을 꿈꾸었던 도량이라 애틋한 마음이 깊어졌다. 나는 무시로 화분 주위를 기웃거려댔다. 차돌을 몇 개 주워와 메우기도 하고 반쯤 남은 흙 위에 엉그름이 생기면 간간이 물도 뿌려주었다.
매화의 계절이 지나간 후에도 아쉬운 마음은 여전했다. 그즈음 함양에 있는 논개 묘에 갈 기회가 생겼다. 봉분은 한적한 야산 위에 기개만큼이나 오롯이 솟아 있었다. 계단을 따라 묘역에 오르자 무덤 주위로 솜털을 뒤집어쓴 할미꽃이 흩뿌리듯 피어있었다. 추모비에는 열아홉 청춘의 논개를 역사의 꽃이라 새겨놓았다. 문득 이 꽃이야말로 충절의 화신花神이 아닐까 싶었다. 집에 있는 화분의 빈자리가 자꾸만 아른거려 슬쩍 한 뿌리를 캐내는 박행薄行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송되어온 할미꽃은 잠시 나팔 같은 꽃잎을 여는 듯하더니 이내 저항이라도 하듯 봉오리를 꾹 다문 채 굳어버렸다.
오월의 나무들은 더 큰 몸짓으로 바람을 맞으며 일렁였다. 하지만 창문 곁에서 제 구실을 못하는 화분만 생각하면 종내 못마땅했다. 내 방은 창 너머로 앞산이 코앞에 닿을 듯 펼쳐지고 사철 새소리가 멈추지 않는 곳이다. 때마침 박새 떼가 둥지를 튼 덤불에 눈길이 머물렀다. 저 새라도 빈 화분에 앉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며칠이 지났다. 박새를 한번 꾀어보기로 작정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어느 스님 흉내를 내었다. 스님이 긴 막대기에 땅콩을 올려 내밀면 새들이 잠시 머뭇대다 경계를 풀고 쪼아 먹곤 했다. 나는 옳다구나 싶어 하루 몇 차례씩 땅콩을 막대 위에 얹어놓고 유혹했다. 새들이 입맛을 들이면 땅콩을 화분 위로 옮겨 유인할 요량이었다. 이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간혹 막대 쪽을 향해 눈 주기를 하는 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호의를 외면했다. 아예 남은 땅콩을 수풀 위에 수북이 던져 주고 은근슬쩍 곁눈질을 해봐도 반응은 신통찮았다. 새들의 눈에도 내 얕은 꾀가 가소로운 모양이다.
늦여름이 지나도록 화분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찬바람이 이는 계절이 되자 더 이상 화분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나는 겨울 동안 창문을 닫고 커튼을 여미었다. 그러는 사이 화분은 까마득히 잊혀졌다.
다시 봄이 왔다. 창 밖 나무들은 새순을 올렸고 숲의 초록빛은 더 짙어졌다. 그런데 작지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화분에서 푸른 이끼가 돋았고 실밥 같은 풀 몇 가닥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괭이밥 씨앗이 산바람에 실려와 잎을 틔워냈다. 잎사귀 사이로 볕살이 스며들고 지문 같은 거미줄은 그늘을 만들었다. 이 모든 풍경을 완성이라도 하듯 깍지벌레 하나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내가 방 안에서 초봄을 외면하고 있는 동안 고 작은 것들은 시련과 역경을 견뎌내었다. 그들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오늘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무심코 화분을 들여다보다가 청개구리 한 마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알 수 없는 전율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반드레한 차돌 위에 초록 이끼 같은 민둥한 등이 정좌를 하고 있다. 호기에 찬 내 모습과는 달리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그와 나 사이에 정적이 인다. 투명한 눈동자를 응시한다. 어디서 어떻게 왔을까. 화살나무 잎가지를 거쳐 아파트 돌 벽을 타고 4층까지 오른 것임이 틀림없다. 한때 기다렸던 박새 대신 생각도 못한 청개구리가 넘실 공중정원에 먼저 발을 내디딘 것이다. 모험심과 두둑한 배짱을 가졌으니 야상군자也上君子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개구리가 제아무리 벽 타기 선수라지만 엊그제 비로소 경칩이 지났는데 오늘 몸소 나를 찾아온 까닭은 무엇일까. 해마다 봄을 기다리는 내게 이른 봄을 전하고자 고행을 자처한 것은 아닌지. 그것이 아니라도 세 번이나 사라져버린 내 봄꿈을 위로해주기 위해 온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비어있다고 억지로 채울 일이 아닌가 보다. 작은 화분이 작은 생명을 얹듯 봄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임을. 흙이 깨기를 기다리면 씨알도 새움을 틔우는 법, 만물의 연緣도 저절로 닿아야 만고의 이치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