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이필선

 

 

 

아침 설거지통 안에서 달그락대며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봄빛처럼 경쾌하다내 안의 생각들이 부산해진다날씨가 좋은 탓이다햇살 반짝이는 봄날에 굳이 집안일을 하자면 할 일이 왜 없으랴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청소기를 돌리고 장롱 문을 열어 겨우내 닫혔던 묵은 공기를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일거리가 된다그런데 열린 창문 밖을 자꾸 내다보고무심한 스마트폰의 반응을 수시로 살핀다.

햇살이 남향의 거실 안을 점령할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마음을 가라앉히고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을 뒤적여본다지면 위의 글은 사방으로 날아 흩어져 글자 위의 생각만 산만하다글인지 아지랑이인지 머릿속이 신기루같이 어른거리기만 한다우윳빛 시폰 소재의 커튼을 흔들며 들어오는 달콤한 바람 탓이다일어나 여러 가지 생각을 매단 채 씻고 나왔는데도 나를 찾는 이가 없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감싸고 마당에 나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바람에 머리를 턴다바람 향이 달콤하다마당으로 들어와 내 몫이 된 햇살과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이며 장난질을 한다수생초를 심었던 수돗가 물 항아리에는 겨우내 놀던 흰 구름이 여태도 세 들어 노느라 평화롭기만 하다수국의 새잎이 나오고 야위었던 송국이 수분을 머금어 오동통 살이 오르고 있다양지바른 베란다의 다육식물 무리는 제철을 맞아 희고 노란 꽃을 앞 다퉈 피워 올리는 중이다.

마당에는 할미꽃이 진작에 피었고튤립도 파랗게 잎을 올린 지 며칠이 지났다현관 앞댓돌 밑 꽃잔디는 다홍빛 여린 꽃잎을 매달고 눈인사를 한다매의 발톱을 닮은 매발톱꽃도 가녀린 꽃대에 매달려 간들거린다화단의 함박꽃과 목단도 붉은 촉을 실하게 올렸고 총탄을 닮은 각시둥굴레 새싹도 삐죽삐죽 땅을 솟구쳐 올리는 중이다별 모양의 하얀 지면패랭이꽃은 앉은뱅이처럼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피어있다.

젖은 머리가 바람에 다 말라간다집 앞 들판에 있는 나무공방으로 가 볼까강변을 걸어 볼까강 건너 화원엘 가 볼까생각은 저 혼자 여러 길을 미리 가느라 바쁘다봄날에 읽는 한 편의 글도 좋겠지만오늘 같은 날은 차라리 몸으로 쓰는 봄물 들 나들이를 택한다.

온전한 봄날을 즐기기 위해 시간을 코 꿰는 스마트 폰은 소파 위에 던져 버리고 집을 나선다집 앞 들판 하우스 속 나무공방에 가서 이 간섭 저 간섭 참견을 보탠다공방은 고택을 헐어 구한 원목으로 만든 비싼 가구에서부터 나뭇잎 모양을 조각한 앙증맞은 찻잔 받침까지 온통 내 취향이라 단골로 드나드는 집이다꽃샘추위를 못 이겨 피워 놓은 난롯불이 정겹고 따스하다가구를 만들고 남은 편백 조각을 난로에 집어넣고 코를 벌름거리며 그 향기를 즐긴다.

공방을 차려보겠다는 일념으로 강습을 받는 젊은 아기엄마의 부츠가 아직은 난로를 피워도 될 이유임을 말해준다주인과 강습생한테 자꾸 말 걸기도 방해될 것 같아 칼을 빌려 공방 밖의 논두렁에서 쑥을 캔다쑥 이파리의 뒷면이 아가의 귀밑 솜털인 듯 뽀얗다저녁상엔 쌀가루와 들깻가루를 빻아 넣고 구수한 쑥국을 올릴 것이다.

쑥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타달타달 걸어 강 건너 화원으로 간다다리 난간에 닿은 햇살이 철재 봉에 튕겨 파닥이는 은어 떼처럼 강물 위로 흩어진다비단결 같은 강물 위 청둥오리 떼가 V자를 거꾸로 그리며 유영한다푸른 산 빛을 품어 안고 겨울을 난 강물은 산에서 비롯되어 모였을 터물길은 더없이 정한 빛으로 찰랑찰랑 흐른다산산하게 부는 강바람을 맞으며 대나무 가로수로 이어진 길을 걷는 마음이 부자다강둑길을 걷는 사람의 물결은 초록 냄새나는 봄빛 수채화다.

단골꽃집 앞에 주차된 차량만 보고도 봄맞이 나온 사람들을 맞이한 양 공연히 반갑다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앙증맞은 꽃모종 포트를 내려다보며 예사로이 말을 건넨다꽃을 좋아하고 봄날을 즐기는 공통점을 가슴에 안고 있는 덕분이다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커피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향이 화원 가득 퍼진다초록의 향연이 펼쳐진 화원은 싱그러움으로 수런대고사람들은 봉긋봉긋 입을 여는 꽃들과의 대화로 들뜬 모습이다어린아이처럼 회원 여기저기를 들쑤시듯 다닌다주인을 돕는답시고 물뿌리개로 물을 준다봄바람을 만나 허공에 맞닥뜨리는 물줄기가 파르르 흩날리며 화초 위로 떨어진다.

노란 아기 개나리와 작디작은 별꽃 등 마당에 비어있는 화분을 채워 줄 꽃모종 여러 종류를 고른다두세 개씩 같은 종류를 모아 큰 화분에 무리 지어 소담스레 심을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이르게 빨간 열매를 매달고 있는 산호수 외에 버젓이 명찰을 달고 있건만 화초 이름조차도 다 모른 체 상자에 담는다귀퉁이 깨진 수키왓장에도 심고 네모난 암키왓장에 심으면 멋스러울 것이다빈 상자 가득히 오종종한 봄을 담아 양손에 들고 쉬엄쉬엄 갔던 길을 되돌아온다.

옆집 할머니네 담장 위에 걸터앉은 백목련은 이미 꽃잎을 다 열어 더러는 나무 아래 누워 고단함을 달래고 있다매화꽃은 바람에 날려가는 풍장이 서럽도록 아름답고목련꽃은 등불 켜듯 피어나 말기 암 환자처럼 고통을 다 바치고 펄썩 떨어진다는데… 그 고통이 아름다운 향기였었다니 목련꽃 다 지기 전에 고통으로 승화된 목련꽃차로 오늘이 봄날을 접어야 할까 보다.

화초 상자를 내려놓고 거실에 들어서는데 초인종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봄날의 대명사 같은 아기 얼굴이 인터폰 화면에 뜬다따따부따 알아듣지 못하는 봄빛 언어로 문 열라고 한다삼월처럼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돌 지난 손자다개미 딸기의 여린 속살을 닮은 내 손주가 다박다박 걸어 들어오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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