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 이필선
밥상 앞에만 앉으면 생기는 버릇이 있다. 국만 먼저 먹고 밥은 그대로 남기는 것이다. 남보다 늦지 않게 국을 다 먹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한 그릇의 국을 다 비우고 나면 고된 일을 한 듯 지쳐 버린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도 뜨거운 국을 먹어야 했던 유년기 때의 생긴 트라우마(trauma) 때문이다.
어릴 적, 담을 사이에 둔 옆집의 잔칫날이었다. 어머니는 점심때 꼭 그 집에 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마을의 잔치가 있는 날이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 말이 없다 하더라도 배가 고프면 당연히 어머니가 일하는 곳으로 가야 했다.
어머니는 하얀 천막 아래 음식을 담아내는 곳에서 일을 돕고 있었다. 엄마를 찾아 들어간 장독대 뒤에는 내 친구 정옥이 엄마도 있었다. 정옥이 엄마는 다른 엄마들과 달리 일은 하지 않고 장독대에 걸터앉은 주인 앞에서 맞장구를 치며 놀다가도 집에 돌아갈 때는 음식이 가득 든 함지박을 이고 가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게 음식을 집으로 이고 가는 정옥이 엄마와 달리 어머니의 손에는 품앗이 음식으로 이고 갔던 단술 항아리나 빈 보자기뿐이라 실망하고는 했다.
그 날도 다른 애들은 누가 뺏어갈세라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지만 나는 양 많고 김이 술술 나는 뜨거운 국이 싫었다. 당연히 다른 친구들보다 늦게까지 국그릇을 안고 있었다. 일손 바쁜 어머니는 식기 전에 어서 먹으라고 곁눈질로 채근했다. 그러다 빈 숟가락만 물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한 어머니는 국그릇을 뺏어 들고 가더니 김이 술술 나는 국을 새로 퍼 왔다. 울컥 화가 났다, 뜨끈뜨끈한 국을 숟가락으로 몇 바퀴 휘휘 젓기만 하다가 어머니의 눈을 피해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혼자 천막을 벗어 나왔다. 돌담 골목길을 따라 누운 큰 가죽나무 그늘을 친구삼아 타달타달 걸어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찬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변변한 반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메주콩을 볶아 만든 콩자반이나 시커먼 무 장아찌가 전부였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께 어김없이 타박을 들었다. 다른 친구들은 누가 뭐라거나 말거나 잘도 먹던데 나만 유별을 떤다며 속상해했다. 고기가 흔치 않던 시절, 그날 하루만큼은 고기를 넣어 끓인 육개장으로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었던 어머니의 뜨끈한 사랑이었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복국을 자주 끓였다. 겨울이면 집집의 처마마다 목을 늘이고 매달려 있는 복어를 보는 풍경이 낯설지 않던 때였다. 무를 어슷어슷 빚어 넣고 말갛게 끓여 참기름 방울을 띄운 복국은 그나마 내가 좋아하던 국이었다. 그 중에도 유독 복어의 껍질만 발라먹기를 좋아했다. 복어의 하얀 뱃살 껍질과 까만 등껍질은 쫀득쫀득해서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두레상을 앞에 두고 앉은 언니 오빠의 국그릇 속 두어 점 복어의 껍데기를 탐내곤 했다. 언니 오빠는 껍질을 덜어 주는 대신에 내 몫의 하얀 살코기를 채 갔다. 아버지의 젓가락에 걸친 복어껍질도 슬며시 내 국그릇으로 넘어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살코기를 안 먹고 먹을 것도 없는 껍데기만 먹는다고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동생 것을 뺏어 먹었다는 이유로 언니 오빠도 덩달아 쥐어 박혔다. 그래서 내게 있어 국은 한숨이며 눈물이다. 뜨거운 국물만 봐도 한숨부터 나온다. 먹기 싫은 국을 억지로 먹이려 들던 가난한 어머니의 눈물 같은 응결체다.
다 자라서 객지 생활을 하면서도 국만 받으면 뭔지 모를 서러움으로 버거웠다. 알지 못할 상흔 같은 건더기들이 젓가락에 걸려들었다. 복국 껍질을 내 국그릇에 옮겨 주시던 아버지 생각 때문이었다.
아버지 장례식날 비가 억수같이 왔다.
‘어하여 어하여 어하남차 어하여!’
꽃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은 저승 가는 길이 슬프다며 빗줄기 속에서도 발길을 더디 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선두장단에 맞춰 발장단으로 빗소리를 다지듯 누르며 갔다. 선두에 선 상여꾼의 선창에 맞춰 뒷소리를 따라 하던 출상행렬은 통곡으로 이별을 전했다.
아버지를 묻을 묫자리에 꽃상여를 내려놓고 술을 따랐다. 술을 따르기 바쁘게 반 잔이 한 잔 되고 한 잔은 흘러넘쳤다. 사람들은 예의인 양 고인이 된 아버지 눈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라고 했다. 출상행렬을 따르며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뜨거운 쇠고깃국 대접을 했다. 국물 속의 소나기 줄기 같은 건더기를 건져 올리던 사람들은 그날의 폭우를 아버지의 눈물이라며 다시금 입을 모았다. .
삶에 있어 어렸을 때의 기억은 생각만큼 쉬이 지워지지 않는가 보다. 특히 어려웠을 때의 기억일수록 더 두꺼운 벽을 만들어 둔 것인지 쉬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오래된 기억은 나도 모르게 국그릇을 먼저 비우는 습관을 만들어 버렸다. 내가 국에 밥을 말아 먹는다는 것은 체념을 의미한다. 그 양 많고 뜨겁고 맵기까지 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말아 버린다. 그것은 세상에 덤벼들듯한 자세로 자신없는 것에 먼저 도전하는 객기 같은 것이 돼 버렸음을 누가 알까.
식단에서 국은 매일이다시피 상에 오르는 주요메뉴다. 국의 특징은 그 재료가 바짝 말라 여문 것이든 질긴 것이든 국물은 이미 그 속 깊이까지 스며들어 섬유질마저 더 부드럽게 한다.
음식이 성품을 만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간 버겁게 먹어 낸 국그릇 수만큼 나는 매사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다. 국 속에 든 다양한 재료를 국물이 다 포용하듯 누구를 보듬어 안아 다독여 줄 따뜻한 인성을 지니지도 못했다. 행여 부족한 영양소가 있다 하더라도 넉넉한 양으로 포만감을 즐기게 하는 국의 장점을 포용치 못해 안타깝다.
뒤늦게나마 국그릇을 밀어 내듯 밀쳐내며 누구에겐가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뜨거운 국물 한 사발 내 앞에 두고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