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의 추억 / 최민자

 

 

 

도 공산품이라는 사실을 제작공정을 보고서야 알았다. 문화센터 한구석 큼큼한 가내공장에서 숙련된 도제와 견습공들이 시의 부품들을 조립하고 있었다. 누군가 앙상한 시의 뼈대를 내밀었다. 곰 인형이나 조각보를 마름하듯 깁고 꿰매고 잘라 내고 덧붙이며 간간이 웃음과 농담도 섞으며 정성스레 매만지는 손길들이 골똘하고 따스했다.

시는 머릿속에서 튕겨 나오는 게 아니고 몸속 여기저기를 흘러 다니다가 손끝으로 감실감실 새어 나오거나 앞 문장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절름절름 걸어 나오는 거라고, 스티치 위에 인두질을 하고 반짝이 가루를 도포하던 장인匠人이 말했다. 얼추 완성된 시제품 위에 그가 냉큼 새 라벨을 붙인다. 털도 안 뽑힌 살덩어리에서 비계를 발라내고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섬세한 칼끝을 찔러 넣으며 시의 긍경을 맞추어 내는 솜씨가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를 생각나게 하였다.

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물속에서 고요히 부화되어 나오는 줄 알았던 나는 일순 살짝 맥이 풀렸다. 영혼도 팔 할은 남의 것, 시만 오롯이 순혈일수는 없겠으나 산야초인줄 알고 먹은 나물이 화학비료 줘 키운 하우스 작물임을 알아 버린 것처럼 허탈하고 씁쓸했다. 시란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이라 했거늘, 고독도 돌봐 줘야 시가 되는 모양이다.

엉겁결에 수필에 발을 들이고 몇 권의 책을 내는 동안 간간이 시를 흘끔거렸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첫사랑 소녀를 그리워하기도 하는 남자처럼 개인적 장르적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불쑥불쑥 시가 궁금해지곤 했다. 내 수필들을 읽은 시인 몇이 시로 갈아타라고 부추길 때에도 어릴 적 꿈이 아슴아슴 살아났다.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해묵은 짝사랑에 불이 붙어 불쑥불쑥 월담을 꿈꾸기도 했다.

삼박사일, 오박육일 현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싶었다. 맘가는 놈마다 모조리 붙잡고 밤낮없이 한 덩어리로 엉겨 붙고 싶었다. 오래 묵혀 둔 불임의 자궁 뜨겁게 달구어 숨풍숨풍 새끼들을 싸지르고 싶었다. 감추어진 화냥기에 불 확 당겨 줄 화끈한 놈 하나 어디 없을까. 허파에 바람 든 여인네처럼 들썽들썽 기웃대기도 했다. 잘빠진 새끼들 펑펑 쏟아 내면 늙다리의 바람기도 용서 받을 것 같았다.

이놈저놈 함부로 집적거리다 겁도 없이 내질러 놓은 사생아 같은 시편들. 향기도 없고 여운도 없었다. 에스프리는 더더욱 없었다. 시란 몸 안에 서식하는 물음표들을 말쑥한 느낌표로 뽑아 올리는 작업이겠으나 내 안에 유숙하는 질문과 회의들은 어둡고 컴컴한 구절양장 같은 산도産道를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달도 차지 않은 미숙아를 낳느라 기를 쓰고 끙끙거리다 머리가 깨지고 꼬리가 잘리고 사지가 뒤엉킨 핏덩이들을 아무도 몰래 유기해 버리곤 했다.

어렵게 착상이 되었으나 빛도 보지 못하고 유산된 시의 유혼들이 밤마다 베갯머리를 어지럽혔다.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닌 글들, 이 맛도 저 맛도 못 내는 글들이 문서 파일 여기저기에 나뒹굴었다. 일부종사가 어렵다기로 양다리를 꿈꾸다니. 더 이상 헤매다가는 돌아갈 길조차 잃고 말 것 같아 빛도 보지 못한 습작들을 어느 새벽 가차 없이 살처분해 버렸다. 사십 년 짝사랑이 그렇게 멀어졌다. 내 충동적인 엽기행각으로 무참하게 살해당한 시들을 애도하듯 함박눈이 푹푹 쌓이고 있었다.

분업과 협업, 아웃소싱을 거쳐 생산된 시가 만족스러운지 견습공이 꾸벅 허리를 굽혔다. 주름진 얼굴에 번져 나는 무구한 웃음이 좋아 보였다. 그러게, 사람아. 공산품이면 어떻고 수예품이면 어떠냐. 돈 냄새만 좇아 정신없이 휘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말을 섬기고 마음을 받드는 사람들이 문장의 늑골을 부러뜨리고 생각의 파편을 꿰맞추어 가며 산고를 치르고 있는데. 시는 내 인생에 술 한잔 사주지 않았지만 나는 시인들에게 맑은술 한잔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시인(see-in)이 되고 싶어 줄기차게 제 안만 들여다보다가 시름시름 늙어 버린 여자는 시를 안으로 모셔 들인 사람들과 그 저녁 뒷골목을 오래오래 서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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