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 윤재천
좀처럼 위세를 굽히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의 열기도 자연의 질서 앞에서는 한풀 꺾여 꼬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시절에 맞춰 머물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땅에 내려놓고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자연의 질서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가고 오는 것은 순리이고, 천만 겁 지켜온 만유물상의 약속이다.
며칠 사이에 먼 산의 그림자 빛깔이 눈에 띄게 짙어졌다. 아직 한낮 땡볕 위세는 여전하지만, 그늘에 들어서면 한기(寒氣)가 느껴지니 마음까지 산란해진다. 가을의 가슴속엔 무엇이 들어있기에, 좀처럼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다.
그동안 가을을 수없이 맞고 보냈으니, 이제는 어느 정도 의연해 질 때도 되었으나 아직도 가을의 풍광에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가을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다.
조금은 지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키워왔던 기다림을 송두리째 포기해버린 사람과도 같이 그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으면 연민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올 가을은 여느 때보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애처롭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없다.
가을의 남루(襤褸)는 더 초라해 보이고, 짙은 화장도 위선을 가리기 위한 가면 같아 살아있는 것들 속에서 애잔함이 느껴진다. 무슨 말 못 할 이우가 있거나, 갑자기 시력에 이상이 있어서도 아니다.
공연히 무엇이 치밀어 올라 눈물을 만들어놓고 도망치듯 사라지곤 한다. 그냥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때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내려 당황하게 할 때가 있다. 어떤 비감(悲感)일까.
아침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서 거리로 들어설 때도, 사람을 만나러 시내에 놔왔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골목으로 들어설 때도, 석양(夕陽)이 붉게 물들거나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져 쇼 윈도우에 불이 켜질 때도, 불빛과 맞닥뜨리면 갑자기 콧등이 싸해지면서 눈물과 만나곤 한다. 어떤 때는 진정이 되지 않아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길 한쪽으로 시선을 비킬 때도 있다.
눈물이 길을 가로막는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김현승 시인의 시 「가을의 기도」다.
작가는 이 시를 통해 절대고독의 상태에 이르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모든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맑고 순수한 영혼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다.
모국어로 채워진 아름다운 열매 - 김현승 시인에게 있어 그것이 ‘기도’라고 한다면, 나에게 있어서의 ‘열매’는 어떤 것일까.
어느 가을, 나의 ‘눈물’이 시인의 ‘기도’와 같은 존재일지고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말이나 글로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내 삶이 만들어낸 진실의 결정체라고 생각해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나를 지금까지 지탱케 한 그 무엇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눈물로 바뀌어져 소리 없이 파도를 일으킨다. 서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탈출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눈물은 나의 기도다.
사람에 따라 ‘눈물’을 슬픔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눈물의 의미를 그것 하나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부당하다. 슬픔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겐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없다.
옛날, 한 망국(亡國)의 임금은 자신의 신하들이 적국의 노예가 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땅을 치며 울었다. 후회와 슬픔에 휩싸여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자신의 아내와 딸이 노예가 되어 모진 채찍을 맞아가며 피투성이가 되어 무거운 짐을 옮기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슬픔이 극에 이르러 있기에 울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눈물을 슬픔의 표상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눈물을 기쁨이나 감격의 표출물이라고 볼 수도 없다.
나의 눈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 나의 눈물이 나를 지탱케 하는 생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내 뿌리를, 내 온몸을 적시는 버팀목으로서의 생명수 - 나는 눈물을 통해서 가을의 의미를 다시 만나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가을은 아름다운 열매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값진 시간이다. 나는 이 비옥한 땅 위를 조금도 흔들림 없이 눈물을 흘리며 걷고 싶다.
그것은 진실한 나로, 나의 온전함을 지키며 사는 길이다.
이 가을은 어느 계절보다 아름다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