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어지는 것들 / 최장순


 

 

 

수위(水位)와 수목의 변화와, 시절에 맞춰 파는 꽃까지, 눈에 띄는 차이는 아니어도 마음으로 느끼는 변화는 조금씩 달라서, 천변을 걷는 걸음이 가볍다.

리듬을 타는 것인가. 노인들의 아다지오와 아이들의 알레그로’, 수시로 발을 멈춰 호기심을 담아내는 스마트폰의 가르고까지, 걸음의 빠르기도 다양하다. 도심과 아파트 군락을 가로지르는 탄천. 절벽 같은 인공물에 철마다 변화를 주는 자연물이 공존하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탄천 길을 좋아하는 것은 단조롭거나 지루하지 않아서다. 굽어지지 않은 길이 없듯, 곧게 흐르는 강은 없어 용인 범화산에서 발원한 탄천은 분당 구미동에서 큰 물굽이을 만나 유속을 늦추고, 정자동 쪽에서 다시 휘감아 돌며 한강에 합류한다. 성미 급한 남자를 닮은 곧게 뻗은 물길을 온몸으로 받아주는 물굽이, 그 만곡부는 여성의 포옹 같다. 여울진 쉼이 있는 그곳에 비스듬 누운 버드나무는 푸른 잎을 물결에 드리운 채 출렁인다. 일필휘지, 자유로운 필법 같다. 주변으로 잉어들이 군무를 펼치고, 한 무리의 오리들이 여유롭다.

곡선은 원만함과 여유와 아름다움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치열한 몸부림이 있다. 산란기의 열목어가 제 몸길이의 열 배나 되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홍천군 내면의 취소폭포. 거대한 장벽을 만난 열목어는 평온한 물살을 가르던 지느러미의 힘으로는 뛰어 넘을 수 없음을 본능으로 알아챘다. 꼬리와 몸통을 힘차게 구부리는 혼신의 반동으로 폭포를 차고 오르는 것이었다. 산란에 적합한 얕고 잔잔한 여울에 도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산란과 맞바꾼 어미 열목어는 굳은 시체로 떠올랐다.

낚시 광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저수지에서 잉어낚시를 했다. 수면에 솟아있는 찌에 잠자리만 쉬었다 갈 뿐,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하품을 쏟을 즈음 찌가 보이지 않았다. 먹이를 놓친 줄 알고 미끼를 갈아줄 요량으로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순간, 무겁고 팽팽하게 당겨진 낚싯줄에 흥분과 긴장이 휘청거렸다. 낚싯대가 피라미나 잡아 올리던 곧은 막대기였다면 그 힘에 꺾이거나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대나무 낚싯대의 휘어짐으로 고기의 저항력은 줄어들었고 온전히 고기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팔뚝보다 큰 잉어를 난생처음 잡아본 중학시절의 짜릿함은 곧장 직선으로 치닫던 사춘기에 느낀 굽어짐의 위력이었다.

굽은 골목은 은밀하여 정겹다. 오래된 골목엔 저마다 이야기가 숨어있다. 계단을 통해 끝인가 싶다가도 새로운 길이 열리고, 동심의 깨금발이 가위 바위 보로 오르내린다. 그것을 따라 걷다 보면 가슴이 싸한 오랜 일도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담장 안 애기우는 소리가 반갑고 낮게 널린 빨래와 소박한 화분과 나무들까지 정겹지 않은 것이 없다.

통신사들은 왜 휘어진 스마트폰을 만드는데 경쟁할까? 평평한 기기보다 둥글게 휜 편이 편안함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폰을 완만한 휘어짐으로 디자인하면 손에 쥘 때 안정감을 주고, 양쪽으로 휜 화면은 성가신 빛의 반사를 줄여 눈의 피로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약간 휜 것이 통화할 때 얼굴에 밀착하는 느낌도 좋기 때문이다. 굽은 것이 평면인 것을 앞서는 이유가 그럴듯하다.

건물의 주체를 철근과 시멘트 벽이라 한다면, 몸은 뼈와 근육이 그 주체다. 딱딱하게 굳은 직선을 떠올리는 뼈, 하지만 경직된 뼈는 몸의 운동과 관계한다. 그러나 신경의 명령을 받은 뼈와 골격근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것은 두 뼈를 잇는 관절과 인대가 있기 때문이다. 바깥보다 안쪽으로 휘도록 설계된 몸의 굴절이 없다면 어떻게 걸으며, 어떻게 인사를 나누며,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형상이 감각기관을 통해 보이지 않는 관념에 이르듯, 하나의 구부림에도 의도와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사람이 문틀에 부딪치지 않고, 허리를 구부림에 따라 정중함이 드러나고, 기쁨과 슬픔에 경배하는 무릎에서 자신을 낮추는 지혜를 본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의사에 한인교포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그는 진료 때마다 환자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두 무릎을 꿇고 대화를 했다.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참한다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굽어질 줄 아는 자세는 그렇게 할 줄 아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두 팔 없이 어떻게 포옹할 수 있을까. 위로와 안식을 주는 포옹은 팔을 안으로 굽힐 수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손목의 구부림 없이 식탁의 요리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칼의 손목이라 할 칼자루를 잡고 만들어내는 많은 요리들, 그것은 손목과 팔목의 운동이 서로 협력한 결과이다. 곡즉전(曲卽全)이라 했다. ‘굽어 온전하다는 것은, 자기주장을 줄이고 상황에따라 뜻을 굽혀야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도덕경의 말씀이다. 휘어지지 않는 강은 얼마나 불안할까. 굽어지지 않는 열목어가 어떻게 폭포를 차고 오를까. 휘어지지 않는 낚싯대로 어떻게 고기를 낚아 올릴까. 구부릴 수 없는 뼈마디로 어떻게 사람의 구실을 할 수 있을까.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이치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제 구실을 한다는 말, 굽어진다는 것은 굴곡이 많아서 스스로 겸손해지고 예절을 갖추는 것, 거기에 비굴이나 굴종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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