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무게 / 유영숙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맑디맑은 도랑물이 제일 먼저 달려 나와 에스코트하듯 나를 맞이한다. 나의 태자리가 있는 마을 논산 양촌의 임화리(林花理)이다.
한적한 마을, 저 혼자 흐르며 심심했던 도랑은 굽이굽이 집까지 가는 내내 그간의 마을 내력을 전하느라 종알종알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예전엔 백 가구가 모여 산다하여 백촌(百村)이라고도 불렸던 마을이지만 지금은 그 5분지 1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유구한 것은 예전엔 민둥산이었던 것이 빽빽한 숲으로 바뀐 나지막한 뒷산과, 그를 마주 보면서 수령 사백 오십여 해를 헤아리고 서 있는 마을 앞 느티나무와 도랑물뿐이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나서 오랜만에 찾아오면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 튕겨지듯 달려 나와 반기던 옛집들은 아예 흔적도 없거나 많이 개조되고, 새로 지어져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사람도마찬가지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낯설다. 그들도 또한 인적 뜸한 마을에 웬 낯선 사람인가 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하기야 고향 떠난 지 벗서 사십 년이 훌쩍 넘었으니 간혹 옛 사람들이 남아 있다한들 오랜 세월, 서로 많이 변해서 길에서 마주쳐도 얼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
사람도 늙지만 집들도 늙는다. 도랑물의 안내를 받으며 마을의 허리쯤 다다르면 온몸에 구멍 숭숭 떨리고 매미 허물처럼 껍질만남은 집 한 채가 낡은 삭신 간신히 버티고 섰다가 나를 마중한다. 반갑다고 달려가 와락 얼싸안기라도 하면그냥 푹 주저앉을 것만 같은, 고향 집의 모습이다.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안고 무너질 듯 위태로운 집은 어린 시절 나의 일기장을 펼쳐 보이며 기억을 더듬게 한다.
와글와글 6남매 살지게 키우던 집은 주변 풍광이 그를 돋보이게 했다. 안채의 용마루 양측 어깨는 우람한 감나무가 듬직하게 받쳐주었고, 그 뒤로는 넓고 푸른 대밭이 있어 뒷산과의 경계를 병풍을 두르듯 이어주었다.
여름날 햇살이 집 정면으로 들면 대청마루를 비워두고 뒷마루로 옮겨가 놀라 엎드려 숙제를 하기도 했는데 서늘한 댓바람 소리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소곤대는지,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그만 엎드린 채로 잠이 들곤 했었다. 어쩌면 내가 글을 쓰게 된 배경 중 하나는 저 대숲이 들려주던 수많은 이야기들이 은연 중 나를 작가로 키웠는지 모른다, 집 앞뜰엔 작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여름에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새끼 붕어와 송사리, 피라미들을 잡아다‘우리 연못에서 살라’고 집어넣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며칠 못가서 그들은 단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고 늘 그곳에 살던 몇 머리의 금중들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개울로 이러진 좁은 수로를 용케도 빠져나가 모두 저 놀던 곳을 찾아간 것이다.
이렇듯 활기차고 건강했던 집이었지만 거기 살던 알맹이들이 하나 둘…,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집은 차츰 헐렁해지다 마침내는 빈 집이 되었다. 그리고 무심한시간의궤적이 집을 매미허물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족이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오면서도 어머니는, 고향에 집이라고 남아 있어야 객지에 있어도 언제나 든든한 안식처가 된다면서 집을 팔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으니 아이들이 뛰어놀던 마당엔 금세 풀이 무성해졌다. 어머니는 때마침 도회지에서 온 어느 젊은 부부에게 사랑채를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그 집엔 아이가 셋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가 모두 집을 비운사이 제들끼리 불장난을 하다 그만 불을 내서 사랑채를 전부 태워버렸다. 그리하여 수십 년 사랑채와 어깨를 기대던 안채는 깍지를 잃고 덩그러니 홀로 서 있게 되었다. 어머니는 화재 피해를 물기는커녕 가재도구와 옷가지를 모두 잃고 오갈 데 없는 그들에게 안채를 내주어 살게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살지 않고 다시 도회지로 이사를 나갔다.
그 후로는 1년에 두서너 번 가족들끼리 선산에 성묘 겸 휴가를 갔다 며칠씩 머물다 오던 것도 차츰 그 빈도수가 줄었다. 그러다 보니 근 십여 년 전부터는 집이 너무 낡아서 아예 발을 들어놓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집도 서로 기대며 사람의 온기를 맞봐야 낡지 않는데 너무 오래 혼자 내박쳐 두었다.
한때는 육 남매를 살지게 키워내며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던 집이었지만, 관리하지 않고 오래 비워진 세월에 장사 없다. 사십여 년 비와 바람의 무게를 홀로 외롭게 견디며 서 있는, 어린 시절 나를 품어 키웠던 내 껍질과도 같은 고향집.
지금은 6월, 저 위태로운 노구는 곧 다가올 장마의 습한 바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 또 한 해 나를 반길 수 있을까. 또다시 홀로 쓸쓸히 남겨두고 돌아서려니 안쓰러움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