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목걸이 / 조정은

 

 

문희와 병택이는 어릴 때 소꿉동무였다.

문희는 나보다 한 살 위의 계집애로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 오빠 밑에서 자랐다. 몸이 튼튼하고 기운이 세어서 골목대장이었다. 맘에 안 드는 애는 사정없이 떠다밀어 넘어뜨렸고 특히 뭔가 아는 척 하는 애를 제일 싫어했다. 정말 문희는 아는 것도 많았다. 방죽 밑의 화춘이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던가, 저 아래 기자 언니가 내 건너 이사 온 집 총각과 솔밭 묘지 앞에서 뽀뽀를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나는 문희를 통해서 들었다.


문희는 산나물도 잘 알고 꽃 이름 나무 이름도 잘 알았다. 보자기로 핸드백이나 망토, 또는 긴 드레스를 근사하게 만들었다. 땅뺏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도 늘 일등이었다. 씩씩하고 자랑스런 문희는 다른 얘들에겐 무섭게 대했지만 내게는 참 친절하고 다정했다. 이웃 마을에서 놀러 온 낯선 얘들에게 나를내 동무여.”라고 소개 할 때는 어깨가 으쓱해지고 신바람이 났다.


내 동갑인 병택이는 딸이 많은 집의 막내아들이었다. 시집갈 때가 된 누나가 둘이나 있어서 예쁜 옷도 지어줬고 늘 깔끔하고 단정했다. 입학하기 전에 벌써 시간을 정해 놓고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셋이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데 병택이 누나가 공부할 시간이라며 그 애를 데려가면 나는 그게 부러워서 쭈뼛쭈뼛 그 뒤를 따라가곤 했다.


문희가 사내대장부 같이 씩씩한 반면에 병택이는 말이 없고 놀이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다. 나도 수줍은데다가 놀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였다. 아이들이 신나게 놀고 있을 때, 병택이와 나는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구경만 했다.


그런 내게도 지금 돌이켜보면 입안 가득 단침이 고이는 즐거운 놀이가 하나 있었다. 문희가 어쩌다 병택이와 나를 데리고 소꿉놀이를 하며 놀아주었을 때다. 마당가에 흙을 파서 2단으로 살강을 만들고 조가비와 사금파리를 주워 그 위에 가지런히 엎어 놓았다. 한 쪽에는 구멍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화장품 통으로 솥을 걸었다. 떨어진 가마니를 끌어다 방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꺾어 조르르 울타리를 쳤다.


문희는 언제나 엄마였으며 병택이가 아빠였다. 나는 대개 아기였고 때론 강아지가 되기도 했다. 그런 역할은 문희가 정해주는 대로 따라야만 했다. 가끔씩 나도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문희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나를 가마니에 눕히고 착한 아기는 잘 잔다며 두어 번 가슴을 다독거리다가 아빠의 손을 잡고 장으로 갔다.


뒷산 참나무 숲이 장터였다. 엄마는 풋 개암이나 아그배 등을 따서 치마폭에 잔뜩 담아오고 아빠는 가랑잎을 차곡차곡 포개어 주머니에 넣고 왔다. 엄마는 아가야, 까까 먹어라. 엄마가 까까 잔뜩 사왔다.”라며 나를 깨웠고 아빠는 일원이요, 이원이요.” 소리 내어 가랑잎을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세었다. 가끔 아빠는 사마귀나 여치, 조그만 청개구리 등을 잡아 오기도 했다. 흙을 조그만 우물처럼 파서 우리를 만든 다음, 그것들을 그곳에 가두려 했으나 그것들은 손에서 내려놓기가 무섭게 번번이 흙담을 훌쩍 뛰어넘어 달아나버렸다.


우리가 소꿉놀이를 하는 곳은 대개 문희네 마당가였다. 문희네는 동네 아래쪽 양지 바른 곳에 있었다. 마당에서 우리 집 쪽으로 조그만 언덕이 있었고 그 언덕 중턱에 커다란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술래잡기를 할 때 술래가 눈을 가리고 수를 세는 나무였다. 감꽃이 필 때부터 감잎이 다지고 까치밥으로 서너 알 홍시만 남을 때까지 그 감나무는 우리의 가장 훌륭한 재원이었다.


감꽃을 주워 먹고 풀 이삭을 뽑아서 거기다 감꽃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었다. 땅바닥을 고르고 감꽃과 감잎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어느덧 감이 주먹만 해지면 떨어진 땡감을 주워 샘가 물 항아리에 우려서 먹었다. 나는 감이 다 우려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꺼내 먹곤 해서 어머니가 손수 지어 주신 포플린 원피스에 온통 시커먼 감물이 들었다.


일곱 살 때였다. 눈을 부비고 일어나 보니 잠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 짓는 소리가 들렸다. 살금살금 밖으로 나와 감나무를 향해 갔다. 감꽃이 만개한 초여름이었다. 노랗게 쏟아졌을 감꽃을 생각하며 서둘러 달려갔다. 그런데 감나무 밑에는 뜻밖에도 병택이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제일 먼저 예쁜 감꽃을 실컷 줍고 싶었는데. 나는 다짜고짜 그 애에게 다가가서 너 여기 왜 왔어?”라고 시비조로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듯 돌아보며 벌떡 일어선 그 애는 풀 이삭에 꿰어 만든 감꽃 목걸이를 불쑥 내게 내밀었다. 그리곤 몸을 돌려 자기 집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엉겁결에 그걸 받아들고 이슬 젖은 풀섶을 헤치며 달려가는 그 애의 뒷모습과 감꽃 목걸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애는 찐 감자나 누룽지를 문희에게만 주곤해서 나를 늘 섭섭하게 했었다. 그런 그 애가 감꽃 목걸이를 나에게 주었다. 고물고물 입술을 벌린 감꽃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빛났다. 조심스럽게 그걸 목에다 걸고 다시 눈을 들었을 때 그 애는 집으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감꽃 줍기를 그만두고 목걸이를 쓰다듬었다. 문희에게 들킬 것만 같아 두려웠고 갑자기 부끄러웠다. 집을 향해 언덕배기 오솔길을 뛰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뛰다가 땅위로 솟아오른 참나무 뿌리에 걸려 엎어지고 말았다. 손바닥과 무릎이 깨져 피가 났다. 감꽃 목걸이는 부서진 채 나뒹굴었다. 나도 모르게 그걸 발로 밟았다. 감꽃의 여린 입술이 터져서 뭉개졌다. 자꾸 눈물이 나서 나는 엉엉 울며 피가 나는 손바닥을 치켜들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도 부서진 감꽃 목걸이처럼 흩어진지 오래 되었다. 문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갔다. 병택이는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전으로 전학을 갔다. 방학이 되면 고향집으로 왔다. 나는 병택이가 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공연히 들떴다. 어머니가 이미 빨아서 꼭 짜놓은 걸레를 들고 나가 바깥 마당가에 있는 샘에 쭈그리고 앉아서 빨았다. 그 애가 장에 가신 자기 어머니를 마중하러 뒷동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우리 샘이 있었다.


그 애는 어머니가 장에 가실 때 함께 뒷동산까지 따라 나섰다가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머니가 어디 쯤 가셨는가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 잠시 후 다시 뒷동산으로 오르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오실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해서 뒷동산에 올랐고 나는 종일토록 샘가를 서성거렸다. 그럴 때마다 그 앤 얼굴을 붉히면서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목을 움츠리고 무심한 척 걸레만 열심히 빨았다. 그러다가 나도 고향을 떠났다.


나는 결혼을 했다. 신혼 여행지는 제주도였다. 제주 공항에 내렸을 때 삼월인데도 함박눈이 펑펑 쏟아졌다. 공항을 나와 한복 치마를 왼손으로 휘감아 잡고 오른 손으로 남편의 팔짱을 끼고 눈발을 헤치며 택시 정거장을 향해 걸어가는데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내게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병택이었다. 하필 내 결혼 날이 그 애 어머니의 회갑이었다는 것이다. 이웃집에서 잔치를 겹쳐 할 수가 없어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로 효도 여행을 온 것이라 했다.


호텔에 부모님을 모셔두고 구경을 나온 길이라고 우물 거렸다. 그 애는 내게 깎듯이 존대 말을 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말을 해보려고 애썼으나 내 입술은 얼어붙어 버렸다. 남편은 어느 새 팔짱을 풀고 앞장 서 가고 있었다. 뒤 목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듯 했다. 어색한 가운데 그 애는 또 꾸벅 인사를 하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알 수 없는 야릇한 슬픔과 허무가 스쳐 지나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감꽃 목걸이를 내게 만들어 주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결혼 목걸이를 걸고 있었지만, 내 가슴 속에는 노오란 감꽃 목걸이가 아직도 동화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그 애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