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가 익는 밤 / 박금아
가을에 들면 달빛은 마방(馬房)에 들어와 읹았다. 어린 말이 벌레를 쫓느라 꼬리로 간간이 제 몸을 치는 소리가 적막하기만 하다. 잔등을 쓰다듬노라면 말은 제 어미를 부르듯 큰 눈망울을 들어 저편 하늘로 “히힝!” 소리를 날려 보냈다.
그곳 말 울음소리가 닿는 곳에서는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서면 푸르레한 공기 속으로 철새가 날개를 퍼득이며 밤하늘을 날았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는 오래도록 울음소리가 남았다. 울음은 밤의 젖줄을 자극이라도 한 모양이어서 유선(乳腺)이 탱탱해진 밤은 젖꼭지를 열었다. 무화과의 발그레한 젖꼭지에서 ‘젖물’이 비쳤다.
태어나서부터 젖이 고팠다. 어머니는 집안일에 어장 일에 젖먹이에게 젖 먹일 시간조차 없었던 것 같다. 고픈 젖을 쌀죽과 원기소로 채우며 자랐다고 했다. 아기 입에는 증조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젖이 물려 있었단다. 빈 젖이었으므로 헛헛증을 앓았다. 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는 바쁜 어머니를 위해 집을 떠나 외가와 친가를 오가며 살았다.
가족과 함께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동기간과 싸워서 어른들에게 매를 맞는 것조차 부러웠다. 앞집 말 ‘구루마’ 집 딸 향란이는 제일 부러운 아이였다. 언니가 우리 집의 일을 도와주고 있어서 그 집엘 자주 드나들었다. 작은 방에 식구들이 모두 배를 깔고 누워서 발장난을 치며 만화책을 읽는 모습이 너무 좋아 나도 식구가 되고 싶었다.
밤이 되어 집으로 올 때면 언제나 무화과나무 아래로 돌아왔다. 어린아이라곤 나뿐이어서 어른들은 더없이 귀애해주었지만 내내 엄마와 동생들이 그리웠다. 밤이면 더욱 그랬다. 마구간의 어린 말처럼 나무를 올려다보기만 해도 입에서 “엄마!” 소리가 나왔다. 그러면 나무는 내 마음을 다 아는 듯 가지를 활짝 펴서는 무화과를 내밀어주었다. 금세라고 누런 젖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무화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향란이네 고양이도 허기를 느꼈던지 내 기척에 귀를 쫑긋거리며 앞발을 돋우었다. “야옹!” 울음은 ‘존재 하는 것’의 또 다른 모습이어서 그 소리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쥐들이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놀라기는 고양이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속으로만 탐했을 뿐, 젖국물이 흥건할 무화과를 한 번도 어찌 해보지를 못한 채 그곳을 달음박질쳐 나왔다.
할머니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적이었다. 마루 기둥에서 탱자빛을 내며 달려 있던 작은 알전구, 마당 깊이 쏟아지던 달빛, 그리고 꼬막 조개처럼 꼭꼭 다문 문(門)의 입들…. 방에 혼자 누워 이불깃을 당기면 ‘울음들’이 들려왔다. 말 울음소리와 철새들과 아직도 놀란 가슴을 추스르지 못한 쥐들의 울음이. 그런 밤이면 잘 익어 쩍쩍 갈라진 무화과의 과육을 두 손으로 흠뻑 적시며 먹는 동생들 꿈을 꾸고는 깨어나 일어나 훌쩍거리곤 했다. 이 모든 울음을 닦아내고도 내 유년의 방은 너무 넓어서 늘 허우룩했다.
열 살 무렵이었다. 방학을 맞아 가족들이 있는 섬으로 갔다. 밤이 깊어서야 일을 끝낸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 나를 앉히고 참빗질을 했다. 머리에서 살찐 벌레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치는 녀석들처럼 당황해져서 나는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의 검지손톱 끝에서 붉은 물이 터져 나왔다. 그날 밤, 마루 틈새에 새겨진 혈흔은 기억 속에서 몸을 불렸다,
늘 배가 고팠다. 태생적인 허기에, 작은 벌레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는 연민까지 겹쳤기 때문이었을 게다. 젖이 고팠으므로 자라서도 시푸른 채로였다. 키만 키웠을 뿐, 웃자라 꽃도 열매도 부실했다. 향란이 집 마당의 무화과처럼 엄마의 젖꼭지는 늘 내 손에 닿지 못하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스스로 나의 젖이 되어야 했다.
자라서 보니 가족들이 기억하는 많은 것들이 내게는 없었다. 가족의 아픔과 기쁨이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했고, 나의 그것들은 가족의 그것이 되지 못했다. 나누어야 할 것은 슬픔이나 고통만이 아니었다. 공유하지 못한 기쁨은 외로움이 되고 슬픔으로 변이되었다. 외로움은 모든 울음의 시원(始原) 이어서 어른이 되어도 ‘내 속의 아이’는 무시로 울음을 터뜨렸다.
오십여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시장터에서였다. 장터는 남도의 특용작물인 무화과들로 무화과밭 같았다. 어머니가 한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더니 나를 소개했다. 향란이 어머니였다. 이제는 할매가 된 향란이 어머니는 단번에 나를 알아보고는 팔고 있던 무화과 하나를 덥석 쥐어주었다. 탱탱하게 영근 유두에서 저고리 섶 아래에 숨겨져 있던 내 젊은 엄마의 젖멍울이 만져졌다.
무화과를 쪼개었다. 어디선가 철새의 울음이 들려왔다. 어린 말과 고양이 울음소리도 났다. 눈을 감았다. 나의 머리를 참빗질하던 어머니의 흔들리는 눈빛이 보였다. 어린 것을 품에서 내쳐야만했던 어머니의 슬픔이 내 가슴에 남실남실 차올랐다. 어쩌면 그때, 내 속의 뜨락에 어린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심어졌는지 모를 일이다.
울음은 존재하는 것들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르는 것을 본질로 한다. 감정이 고조될수록 울음소리가 커지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울음은 그리움의 다른 표현이기도 해서 사람들은 울음소리에 마음을 내어준다. 모든 울음은 익으면 젖이 되는 걸까. 무화과 속이 붉은 것은 울음들의 결정(結晶)이 만들어낸 색깔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슬픔을 이해하게 되다니…. 외로움조차 달콤한 속이 되었음이다. 깜깜한 밤의 시간 속에서도 나의 무화과는 달보드레하게 익어가고 있었던 게다.
오늘밤에도 나는 나의 무화과나무 아래로 간다. 까만 컴퓨터 화면에 설익은 시간을 펼쳐놓고 다독이다 보면 어느새 손가락 끝에서 무화과 꽃잎이 돋아난다. 푸른 달빛 속으로 철새들이 날아가고 아득한 곳에서 향란이네 말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무화과가 익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