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집 아기 / 허효남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창문을 적시는 소리가 촉촉하다. 물기를 머금은 앞산이 은은하고, 구름이 머무는 하늘도 찬찬하다. 창을 흐르는 빗줄기조차 조심스러워 온 세상이 차분하기만 하다.
비 마중을 하다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안방으로 왔다. 백일 지난 딸아이가 아침잠에서 막 깨어났다. 아기를 안아 천천히 등을 토닥여준다. 여느 날보다 긴 잠투정을 달래느라 나도 몰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요즘 나의 애창곡은 '섬 집 아기'이다. 딸아이를 낳고 틈틈이 불러주던 동요가 오늘은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진다. 노랫말처럼 바다로 나간 엄마 때문에 품 속 아이가 혼자 잠든 모습을 그려본다. 동요 속 섬 섬 집 아기가 딸아이처럼 느껴져 노래를 부를수록 가슴이 젖어온다.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잠든 아가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딸을 내려다보는 코끝마저 시큰해진다.
누군가 내게 생애 최초의 기억을 묻는다면, 딸아이처럼 잠에서 깨던 모습이라고 말할 것 같다. 네다섯 살 쯤, 낮잠에서 깨어 혼자 빈방에 앉아 있던 모습이 내 기억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늦은 오후 무렵 홀로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고, 문 밖으로 나갔지만 마당에조차 아무도 없었다. 그때 다시 텅 빈 방으로 들어 왔을 때의 허전함은 아직도 마음을 울적하게 만든다. 방문으로 스며드는 우울한 빛깔의 적막감과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의 묘한 슬픔이 회상을 할수록 서글프다. 오후 다섯 시를 닮은 뉘엿한 햇살과 운동장처럼 넓어 보이던 기억 속 앞마당은 쓸쓸한 풍경화 한 점이 되어 늘 마음속에 걸려 있었다.
종종 아득한 회상 속에서 어린 나를 재워두고 친정 엄마는 어딜 갔는지 궁금증이 들곤 했다. 섬 집 아이 엄마가 굴을 따라 바다에 갔다면, 우리 엄마는 나를 재우고 들일을 나갔다고 여겼었다. 동생을 업은 엄마가 자주 밭에 갔거나 새참을 준비해서 논에 갔을 거란 상상도 했었다. 물음표 가득한 회상의 끝은 늘 미지수였지만, 바쁜 엄마 덕분에 나는 파도소리에 잠든 섬 집 아이가 아니라 매미소리를 듣고 잔 촌집 아기였을 것만 같았다.
시골집 아가였던 내게는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까지 열 명의 대식구가 있었다. 그 많은 가족들은 다 어딜 가고 첫 기억 속에서 나는 혼자였을까. 한 번은 빈 방에 대해 친정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내게는 무척이나 큰일인데 엄마는 거짓말처럼 기억조차 못했다. 감성적인 상상과 달리 열 식구의 상을 차려 내기도 벅찼던 현실을 말하며, 친정 엄마는 내가 잠들면 집안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 했다. 그 시절 두 살 터울 여동생은 엄마에게 떨어지질 않아 항상 업고 다녔고, 누구에게나 잘 가는 순한 아이였던 나는 크게 손들이지 않고 키웠다는 말도 덧붙였다.
때때로 기억이란 정확성보다는 주관성으로 더 쉽게 이해될 때가 있다. 엄마에게는 아이의 낮잠이 잠깐의 일상이었겠지만, 어린 내게는 잠에서 깨어나 누군가를 기다리던 시간이 무척이나 길고 두렵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울며 떼를 써서라도 엄마의 등을 차지했던 여동생에 비해, 나는 고모나 할머니랑 놀거나 혹은 혼자 시간을 보내며 엄마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곧잘 억눌렀던 것 같다. 대식구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라느라 일찍부터 마음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법에 익숙해져야 했던지 모른다. 낮잠을 깨어 마당을 오갔던 것은 동생을 업은 엄마가 올 것이란 기대를 접고, 스스로 혼자인 상황을 극복하려했던 몸부림이었던지도 알 수 없다.
곡해된 기억일지라도, 홀로 깨어나 빈 방에 쓸쓸히 앉아있던 촌집 아기는 여전히 내 마음 안에 살아있다. 문 밖이 아니라 방 안에서 책이나 영화를 보며 즐거움을 찾는 내향적 취미 속에서도 아이를 만나고, 관계의 폭이 넓지 않고 내성적이며 소심한 성격 가운데도 아기를 본다. 상처를 받으면 마음 문을 닫고 침잠하는 회피적 성향 속에서도 아이와 조우하며 이유 없는 우울감이나 외로움이 느껴질 때도 회상 속 아기의 모습이 스쳐간다.
무엇보다 글을 쓸 때 종종 꿈결처럼 기억 속 빈 방에 내가 다시 와있다는 착각이 들곤 한다. 스스로의 감정을 읽지 못해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던 꼬마가 나대신 여전히 방 안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듯하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회상 속의 촌집 아기가 자판을 두드리며, 아직까지도 그때의 외로움을 울음 대신 문장으로 달래고 있는 것만 같다. 차라리 기억 속에서 딸아이처럼 깨어 실컷 소리쳐 울기라도 했다면, 누구라도 달려와 꼬마를 달래주었을 것만 같다. 상심으로 대문과 방문도 닫고 다시 빈방으로 돌아왔던 아이가 오래도록 가여웠으며, 울적한 첫 기억이 서글퍼 회상을 할수록 마음이 무거웠었다.
가끔은 빈 방 속의 꼬마가 너무 슬퍼 보여 내 첫 인생 삽화를 재구성해 보기도 했다. 기억 속 낮잠에서 깼을 때 엄마가 나처럼 '섬 짐 아기'를 불러주는 다정한 모습도 그려보았고, 생떼를 부려 동생을 끌어내리고 내가 엄마에게 업히는 유치한 상상도 해보았다. 과거 속으로 수없이 물음표를 던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칠순을 바라보는 친정 엄마에게 내 기억을 되돌려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착이론을 운운하며 동생만 업고 있던 엄마를 탓해보아도 마음이 편치 않다.
화해되지 않는 기억은 잊혀지길 거부하지만, 시간은 또 다른 방법으로 과거와 재회하게 하는 것 같다. 기억의 뿌리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떠올리면 아직도 때때로 아프다. 다만 지난 시간을 더듬을수록, 허기진 추억 속에서 이제까지 살아와 준 촌집 아기가 고마워진다. 외로운 시간과 결핍뿐인 공간을 견뎌준 것만으로도 정말 수고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아이로 인해 회상 속 빈 방이 결코 텅 빈 곳이 아니라, 사유와 상상의 자유로 더 큰 풍요로움에 눈뜬 근원지로 거듭나 보인다. 기억 속 아이가 참았던 말과 흘리지 못했던 눈물조차 또 다른 노래의 원천으로 다시 보라보게 된다.
가슴 속에 슬픈 노래 한 곡 없이 자라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른이 되어도 하고 싶은 말들을 때때로 함구하고 살며, 여전히 외롭고 서러운 날도 존재한다는 것을 촌집 아이는 알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 가운데 회상 속 아기가 있어 이제는 도리어 작은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울적한 기억조차 때로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듯하다. 내내 마음속에 걸려있던 쓸쓸한 풍경화가 오늘에서야 작고 아름다운 한 점의 성장화成長畵로 다시 바라보인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여전히 창밖을 흐르고 있다. 딸아이를 업고 나와 거실을 오가며 또다시 노래를 이어간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내게 자장가 한 곡 불러 줄 여유조차 없던, 친정 엄마도 지금쯤 빗길 어느 가요교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테다. 빗속으로 엄마는 지난했던 생을 위로하느라 목청을 높이고, 나는 그 엄마의 품을 그리던 한 아이를 달래느라 소리를 이어간다. 마흔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촌집 아기를 업고, 나는 노랫소리 가득한 빗길 속을 걷고 또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