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악보 / 전성옥

 

 

 

바람이 내려앉는다. 힘없는 바람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내 앞에서 주저앉는다. 무릎에 얹힌 뼈 없는 바람. 먼 길을 지치도록 왔는지 긴 병에 몹시 시달렸는지 몹시도 야위었다. 가난한 집 굴뚝의 연기처럼 참으로 가볍다.

야윈 바람의 무게에 휘청한다. 나는 풀썩 주저앉는다. 담도 없고 울도 없는 짙은 고동색의 마루청. 휑하니 넓은 그 마루청 한쪽 가장자리에 앞이 낮고 뒤가 높은 비스듬한 그 마루의 중간 높이쯤에. 벌써 한참 되었다. 초가을 아침의 눅눅한 하늘이 사람의 어깨로 내려앉은 지가.

팔랑팔랑, 얇은 것들이 날아 내린다. 마루청 가장자리를 따라 듬성듬성 둘러선 느티들. 어리다. 아직 어리다. 마루를 뚫고 선 세 그루의 느티들. 이들 역시 허리가 두어 줌밖에 되지 않는다. 이들이. 아직 어린 느티들이 덜 익은 이파리들을 떠나보내고 있다. 갸름한 손가락만 한 느티 이파리들이 떨어지고 있다. 누릇푸릇한 그들이 힘없는 바람을 붙잡는다. 하나가, 둘이 그리고 셋이. 느릿느릿, 가만가만 그리고 조용, 조용히.

바람에 나뭇잎이 붙는다. 바람이 일어서기 시작한다. 이상하다. 내 무릎을 넘지 못하던 바람이 나뭇잎의 무게가 더해지자 몸을 세우기 시작한다. 바람처럼 날아오른다. 온몸에 나뭇잎을 붙이고 기울어진 마루 위를 천천히 옮겨 다닌다. 바람의 몸 위로 또다시 날아 내리는 이파리들, 저 모습 눈에 익은 모습이다. 악보 느리고 낮은, 단선율의 악보이다.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은가. 여기는 통영, 윤이상의 마루청이다. 이곳에 악보가 날림은 오히려 마땅하다. 바람줄기가 오선을 긋고 그 위에 느티의 음표가 붙는다. 무릎에 턱을 괴고 앉은 나는 귀를 모은다. 얇은 소리, 조용하고 느린 선율. 아직은 화음도 없고 반주도 없다. 손가락 하나로 건반을 누르는 듯 둥, , 딩동, 뎅동. 활이 낮은 현 하나만을 문지르는 듯 쓰렁, 지이잉, 브르르.

여러 해 전 통영을 처음 들렀을 때, 세병관 앞에서 눈먼 벅수를 만났었다. 그즈음 세병관은 공사 중이었다. 파헤쳐진 땅이며 깎여 나간 언덕에서 붉은 먼지가 날고, 쏟아놓은 건축자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으며 무슨 이유인지 일을 하지 않고 우두망찰 서 있기만 하는 중장비들,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어수선한 곳에서 그를 만나다니, 감때군 같은 그가 공사장 한쪽 귀퉁이에 멀거니 서 있었다. 타박타박, 다가갔다. 그는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당연했다.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뜨고 있으나 기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말 그대로 벅수였다.

가까이 가서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내 기척을 알아챘는지 긴 송곳니를 빼문 입으로 씨익 웃는다. 수인사를 트자, 먼지를 뿌옇게 덮어쓴 그가 말을 건넨다. 백 년을 이 자리에 서 있었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답을 할 수 없었던 나, 먼지 가득한 그의 어깨 한번 털어주지 못하고 그냥 돌아와야 했다.

두 해를 지나 다시 온 통영. 홀로 왔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슨무슨 문학기행이라는 단체의 일원이 되어 여럿 속에 섞여 왔다. 답사강의를 들으러 모두들 세병관 대청으로 소집되는 사이, 외오돌이로 빠져 벅수를 찾아갔다. 그는 여전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다. 반갑고 고맙다. 묵혀 놓은 답을 이제야 한다. 네가 눈 뜨고도 못 보는 세상, 나라고 어찌 보았겠느냐. 그중에서도 가장 보이지 않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더라고. 그의 여전한 웃음, 송곳니를 길게 내보이며 씨익 웃는다. 나도 씨익 따라 웃는다.

다음 날 이른 오전, 도천테마파크란 곳으로 일정이 잡혔다. 테마파크라니 세상에 이 얼마나 세속적이고 이 얼마나 시류적인 이름인가. 그러나 기실 이곳은 윤이상의 기념관이다. 보여도 보았다 말하지 못하는 백수의 세상이라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이름이야 어쨌거나 이곳은 윤이상을 기억하기 위한 곳이다. 그의 옛 집터 자리에 간결한 형태의 이층 건물이 세워져 있고 뒤편으로 작은 정원과 비스듬한 마루청을 숨긴듯이 달고 있다.

생전에 '현존하는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히던 윤이상, '예술가는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순수하고 정의로운 양심에 뿌리를 둘 때에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에 평생 충실하게 살았던 사람. 이념의 칼이 시퍼렇게 서로를 겨루고 있는 60년대,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고구려 사신도를 보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고, 이 일로 그는 국가의 적이 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도, 국가도, 국민도 모두 상처받았고 모두들 벅수처럼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캄캄하게 감아야 했다. 그리고 긴 시간 그의 음악은 우리에게서 사라졌다.

세상은 벅수 천지다. 그러나 꼭 나무랄 수만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쩌겠는가. 벅수와 내가 그러하듯이 세상 사람들이라고 제대로 보아냈을까. 또 윤이상이라고 모든 걸 다 보았을까, 그리고 본 것은 제대로 보아냈을까. 그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했던 이들이라고 모든 것을 다 보았을까. 본 것이나마 정확하게 인식했을까. 보지 못하는 것의 결과는 언제나 슬프다. 정확하게 보지 못하는 것의 결과는 늘 처참하다. 그러나 이 역시 탓할 수는 없다. 그저, 누군가의 최선이 누군가의 최악이 되었을 터이니.

통영 윤이상의 마루청, 이 경사광장은 15도쯤 기울었다. 실제로는 야외 공연장이기에 관람석의 높이를 조절해놓은 것이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다른 모습으로도 보인다. 두껍고 넓은 어두운 색의 마루청을 살짝 들고서, 그 아래 무엇이 있나 무심히 들여다보는 것 같다. 세상 무거움의 한쪽 자락을 슬며시 들어 올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둘러서서 살아가는 느티들 마루 한가운데를 뚫고 자라 오르는 또 몇몇의 어린 느티들.

기울어진 마루청을 둘러 나무를 심고, 딱딱한 마루를 뚫어 어린 느티를 심어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보아도 보았다 말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만든 이의 의도일 수도 있고, 보는 이의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뒤로, 윤이상이 서 있다. 그러한 것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다. 음악으로, 소리로 세상과 이야기하던 그가 적막 속에 홀로 서 있다. 머플러를 한 그는 조금도 따뜻해 보이지 않는다. 몸의 온기가 남아 있을 때는 결코 오지 못한 이곳을 차가운 청동상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앞에 나서지 못하고 홀로 서 있다. 건물 뒤로 가려진 경사광장, 그 광장이 끝나는 자리. 그 뒤편에 홀로, 얼기설기 나무들 사이에 홀로.

그래도 그는,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다. 신발코 앞에 있는 끝이 올라간 마루를, 그 아래의 무엇들을, 느티들이 쏟아내는 음표들을. 그의 차가운 어깨에 눅눅한 초가을 아침이 겹겹이 내려앉는다. 눅눅한 바람이 올올이 걸린 나도 점차 눅눅해진다. 어디 한 곳에서 금방이라도 물이 터질 것만 같다. 꿀꺽 삼켜 버린다. 바람과 느티에게, 모두에게 보여지라 누군가의 기억이 돼라 당부 한마디 겨우 건네두고 무겁게 일어선다.

또 두 해가 지났다. 잘 마른 따글따글한 바람이 세상과 사람 사이로 불고 있다. 통영 도천마을 느티 마당에 오선이 쌓이고 음표들이 자꾸만 날아 내린다 한다. 이젠 단선율이 아닌 판타지 악보가 그려진다 한다. 테마파크라는 메떨어진 이름 대신 '윤이상 기념 공원'이란 본명도 되찾게 된다 한다. 청동 속에 든 그의 심장이 궁금하다.

자욱이, 아침이 깊어가고 있다. 세병관 벅수를 찾아갈 즈음이 되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