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간이 법칙 / 김예경
성격이 침착하지 못한 사람을 두고 덜렁댄다고 한다. 나는 침착해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듣는데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덜렁대는 편이다. 단적인 예로 나는 집 안에서 내가 보관해둔 물건을 잘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 약점을 감안해 잘 보관한다고 해도 그런 물건일수록 더 못 찾으니 그런 때는 참말이지 답답해 미칠 노릇이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지 보관에 문제가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집에서 내가 찾지 못하는 물건을 찾아내는 사람은 항상 큰딸이다. 딸은 본인이 둔 물건을 그렇게나 못 찾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자기가 둔 물건이 아닌데도 그리 쉽게 찾아내는 딸을 이해하지 못한다. 분명히 비결이 있다 싶어 물어보지만 대답은 항상 똑같다. 물건의 종류에 따라 보관할 만한 장소가 대강 짐작이 가지 않느냐고 한다. 그래서 나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보려고 애쓰지만 뜻대로 된 적은 별로 없다. 생각과 생판 다른 곳에서 물건이 나오기 일쑤다. 그러니 어쩌면 못 찾기보다 보관하기 자체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겨우겨우 어떻게 찾아낸 물건은 영락없이 내게 '얼간이 법칙'을 증명해 준다. 찾는 물건은 항상 마지막으로 찾는 곳에서 발견된다는 얼간이 법칙 말이다. 이런 법칙까지 있는 것을 보면 세상에는 나처럼 물건을 잘 찾지 못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 좀 위안이 된다. 그런데 어떤 이가 여기에 또 한 가지 이론을 덧붙였다. 찾는 물건은 항상 맨 처음 찾아본 장소에 있는데도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 법칙이 모두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니 내가 바로 그 얼간이가 아니고 무엇이랴?
참으로 말하기 부끄러운 얘기지만, 큰아이가 결혼해 외국으로 간 뒤 내가 가장 답답했던 것은 물건을 찾는 일이었다. 수시로 국제전화를 걸어 "얘야, 아무것이 어디 있는지 너 아느냐?"고 물었다. 거의 매번 딸이 찾아보라고 한 곳에서 물건이 나왔다. 오죽했으면 딸아이가 "엄마, 그냥 방바닥에 다 내놓고 사세요." 했을까. 이토록 창피한 버릇을 평생 고치지 못하는 내가 정말이지 안타깝다.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어제는 집 안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분명 아침나절에 쓴 전화기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를 않았다. 집 전화로 내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보니 명쾌한 벨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그런데도 찾지 못하는 것은 내가 한쪽 귀를 전혀 듣지 못하는 까닭이다. 눈앞에 있는 물건도 그냥 지나치는 덜렁이에 귀까지 시원찮으니 설상가상이라고나 할까.
원래 귀가 하나뿐인 동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귀는 꼭 두 개여야 하리라 싶다. 한쪽 귀로만 들어서는 소리의 방향이나 거리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이쪽인가 하면 저쪽 같고, 저쪽인가 하면 이쪽 같다. 나중에는 사방에서 소리가 울려 머리에 쥐가 나려고 한다.
발목이 시큰거리도록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전화기 찾기를 포기하고 작은딸을 불렀다. 현관문 밖에서 미리 내 휴대폰을 울려놓고 들어선 딸이 곧장 거실 장식장 앞으로 가더니, 그 위에서 울리고 있는 전화기를 집어 내 손에 '꽉' 쥐어주었다. 그러자 아침에 그 장식장 앞에 서서 통화를 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마침 밖에 누가 찾아온 바람에 급히 끊은 전화를 그 위에다 올려놓았던 것이다. 기억에 났으니 그나마 치매는 아니라 싶어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장식장은 내 머리 높이쯤인데 전에는 그렇게 높은 곳에다 휴대폰을 올려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귀의 약점 때문에라도 휴대폰은 꼭 문갑이나 책상 위에 두는 것이 내 원칙이다. 그러니 휴대폰을 찾을 때도 생각을 책상 높이 이상으로는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생전에 친정어머니께서 날더러 차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덜렁댄다고 하시던 말씀은 결코 공연한 꾸지람이 아니었다. 나는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덜렁대는 성격임이 분명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소풍 가서 보물찾기에 단 한 번도 성공해 본 적이 없고, 시험에서 틀린 답은 거의가 문제를 꼼꼼히 읽지 않아서 생기는 결과였다. 그렇다고 마냥 덜렁대기만 하는 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은 것이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바느질을 할 때 누구보다도 꼼꼼하고 침착하다고 자부한다. 참으로 알지 못할 이중성이다.
덜렁대는 성격도 성격이지만 내가 생각을 책상 높이 이상으로 올리지 못한 데에는 실상 크게 일조하는 공신이 하나 있다. 바로 직선적이고 답답한 내 고지식함이다. 고지식해서 융통성이 없는 내 머리는 한번 입력된 생각은 그대로 굳어 고정관념이 되면서 좀처럼 수정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 '갑'이었으면 끝까지 갑이어야지 '을'이 될 수는 없으니 누가 뭐래도 나는 지조가 굳은 사람이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어찌 사람이 생각을 요랬다조랬다 조석 간으로 바꿀 수가 있단 말인가? 한 번 '휴대폰은 여기에'라고 했으면 죽어도 여기여야지 왜 엉뚱한 곳으로 물건을 내돌리느냐는 말이지. 그러니까 물건은 둘 때 잘 두어야 한다는 말이 정답인가 싶다.
그런 고지식함이라면 처음에 물건을 둔 장소가 왜 고정관념으로 남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통 없다.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니 말이다. 없는 침착성이 이 나이에 새삼 생길 것 같지는 않고, 얼간이 법칙이라도 좋으니 보관해둔 물건을 제발 제 때에 찾아 쓰기나 했으면 좋겠다.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한다.
"얘야, 쓰고 나서 제발 내가 둔 자리에 두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