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천의 피라미 / 목성균

 

 

 

청주시 한 복판을 가르며 흐르는 냇물을 무심천(無心川)이라고 한다. 마음을 비워 주는 냇물이라는 선입견을 주는 이름이다.

청주를 양반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걸 명예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취적이지 못한 도시라는 말 같이 들려서다. 양반, 고루한 보수성향의 비생산적인 사람을 가르키는 말로 들리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심천이란 냇물의 뉘앙스가 그런 소리를 듣게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심천, 왠지 소리치며 흐르는 냇물이 아니고 흐르는지 안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시체(時體) 말로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우유부단한 사람을 이르는 이름 같아서 맘에 안 든다. 아무튼 좋다. 무심천(無心川)이든 유심천(有心川)이든 냇물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냇물이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여름밤에 무심천에 나와서 멱을 감았는데, 모래를 깔고 앉은 엉덩이가 간지러워서 손으로 움키면 모래무지가 잡힐 정도로 맑은 도심하천이었다. 무심천에 남자들만 목욕을 한 게 아니고, 대담한 여자들도 목욕을 했다. 야음(夜陰)에 어리는 백옥 같은 여인의 살결을 훔쳐보려고 엉큼한 사내들이 목욕하는 여인들 곁으로 다가가면 여인네들의 자지러지는 소리가 천변을 울렸다. 그러면 제풀에 놀란 벌거숭이들이 냇물을 첨벙거리며 달아났다.

그 때는 청주 인구가 팔 만 정도였고, 무심천 둑에는 나무장사들이 나뭇짐을 바쳐놓고 팔리든 말든 무심한 얼굴로 나뭇짐 그늘 밑에 앉아있을 때다. 무심천이 맑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팔 만 시민이 사는 사회도 맑아서 무심천에서 성폭행 사건 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사내들의 객쩍은 수작은 수작으로 끝난 낭만이었다.

벚꽃 만발한 그 시절의 봄 날, 냇둑에 서서 꽃 그림자를 비추며 흘러가는 무심한 물결을 바라보면 사무친 마음도 무심해 지기는 했었다. 해질 녘이면 냇물에 여울 낚시를 드리우고 서서 발갛게 노을에 젖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 아-! 누가 지었을까, 냇물이름을 무심천이라고-. 그리 감탄을 했었다.

그 냇물이 국민 소득 100만 불에서 시궁창이 되었다. 무심천 밤 벚꽃 축제를 구경하러 나간 적이 있다. 축제의 불빛에 어린 무심천 냇물은 요염하기까지 했는데 부패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겨우 100만 불 소득에 육십 만 시민의 경거망동한 배설이 꿈과 낭만의 무심천을 죽여버린 것이다. 무심천에는 모래무지도 살지 못하고, 야음에 목욕을 하는 사람도 없고, 노을 속에 서서 낚시하는 사람도 볼 수 없는 죽은 하천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이었다. 비가 오는데 무심천 하상도로(河床道路)를 지나다가 냇물에 의젓하게 서있는 새를 보았다. 백로였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냇물 여기 저기 백로가 긴 다리로 유유히 걷고 있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는 가지 말라는 그 백로가 의관을 갖춰 입은 고고한 기품의 선비처럼 아주 거드름을 피우며 성큼성큼 걷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반가워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백로를 구경했다. 백로 한 마리가 재빨리 물에 부리 질을 하더니 파닥이는 은빛 물고기를 한 마리를 물어 올리는 것이었다.

청주시에서 시책으로 하수관로를 매설하는 등 무심천 살리기 사업을 벌이더니 무심천의 수질이 개선 된 것인가. 무심천에 가로질러서 외나무다리처럼 놓은 콘크리트 쪽다리에 서서 물을 들여다보았다. 물밑에 피라미들이 놀고 있었다. 날씬한 유선형 몸체로 재빨리 헤엄을 치면서 놀고 있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는 부지런하기 이를 데 없는 민물고기-.

무심천에 피라미를 주축으로 하는 먹이 사슬이 이루어 진 모양이다. 최소한의 수생(水生)곤충이 물가에 살기 시작했나보다. 냇물에서는 이직 냄새가 났다. 3급수쯤은 될라나 모를 일이다.  3급수에 피라미가 수생곤충을 먹고살려고 모여든 것이고 피라미를 먹으려고 백로가 온 것이다. 처음에 백로들은 도심을 벗어난 무심천 하류 쪽에서 발견되었는데 점차 도심 쪽에서도 발견이 되었다.

그 후, 무심천에 걸쳐놓은 시멘트 쪽다리 위에 걸터앉아서 여울낚시대를 드리운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을질 녘이었다. 한가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흡사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세월을 낚는 강태공을 본 것 같아서 차를 멈추고 낚시꾼 곁으로 다가가서 구경을 했다. 곧은 낚시가 아니었다.

낚시하는 사람은 30대쯤 되는 젊은 이었다. 고기를 낚으면 미늘에 입이 안 다치게 조심조심 고기를 빼서 물에 던지는 것이었다.

왜 고기를 놓아줍니까?”

고기에서 냄새가 나서 먹지는 못해요.”

그럼 무엇 하러 고기를 잡느냐고 물으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젊은 사람이 이 시간에 강태공처럼 낚시를 하는 말못할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I.M.F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나는 해가 서산에 기웃하면 낚싯대를 메고 냇가로 나가서 여울낚시(파리루어 낚시)를 했다. 당시 나는 착잡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농사를 짓기로 맘먹었지만 왜 그리 좌절감이 엄습하는지 해만 기웃하면 낚싯대를 메고 냇물로 나가서 어두울 때까지 낚시를 했다. 그러면 모든 잡념을 잊을 수 있었다. 조령산 꼭대기에 걸려있던 햇살 마저 꼴딱 지고 나면 사위가 벌겋게 잔광에 물들고, 피라미들이 일제히 물위로 뛰어 오르면서 냇물도 어두워지고 사위는 고요해진다.

물에 담가 놓은 종다래끼에 피라미들이 가득했다. 몇 마리의 깨피리와 꺽지말고는 전부 피라미들 뿐이었다. 왜 그리 피라미들이 고마운지 모를 일이었다. 외로울 때 곁에 있어준 친구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이놈들이 내 낚시바늘을 물어주지 않으면 나는 상념에서 벗어나지 못 했을 것이다. 피라미들이 낚시 바늘을 물고 파닥이는 손맛에 나는 모든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피라미들이 고마웠다. 나는 어두운 냇물에 피라미들을 쏟아 놓았다. 피라미들은 어두운 여울물로 사라졌다.

무심천 시멘트 쪽다리에 걸터앉아서 피라미 낚시를 하는 젊은이가 젊은 날의 흔들리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젊은이는 무심천에 피라미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어찌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을까.

'yahoo 국어사전'에 보면 피라미를 하찮은 존재에 비유하는 말이라고 적혀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피라미가 어째서 하찮은 존재란 말인가. 일급 수만 고집하는 버들치보다 나는 피라미가 고맙고 좋다.

어느 물고기인들 일급수에서 못 살까. 피라미는 빠르게 흐르는 여울목에서 힘차게 제 몸으로 물살을 일으켜 용존산소(B.O.D)를 보충하면서 산다. 그리하여 백로를 불러들여서 먹이가 되어 준다. 그리고 낚시꾼을 노을 속에 앉아있게 한다. 피라미가 무심천을 이름에 걸 맞는 낭만적이고 시적인 냇물풍경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피라미는 그 내성(耐性)만으로도 고마워 해야하고 그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누가 왜 그랬을까, 나는 하찮은 존재에 피라미를 비유한 까닭을 알 수 없다. 혹 일급 수를 서로 차지하려고 눈만 뜨면 싸우는 버들치인 척하는 사람들이 3급수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멋지게 살아가는 피라미의 내성을 시기해서 그랬을까?

그런 사람은 누구이든 청주 무심천에 와서 피라미 루어낚시를 하면서 참 양반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이 사회의 흐린 수질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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