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악처들 / 김소운

 

 

 

아는 이의 댁에, 짖을 적마다 모가지에서 풀무 소리를 내는 늙은 개 한 마리가 있다.

도시에서 개를 기른다는 것은 집을 지키자는 것이 주목적이다. 더러는 애완용으로 개를 두는 이도 있으니, 만성 천식증에 걸린 이 노견은 어느 모로 보아도 애완용이랄 풍채는 아니다. 그래도 제 딴에는 개 구실을 하느라고 낯선 사람을 보면 명! ! 하고 짖는다는 게 남의 귀에는 구멍난 공에서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개를 겁내는 어린이도 이 개가 짖는 소리를 들으면 픽- 하고 웃어버린다.

거저 주어도 가져갈 사람 없는 병신 개를 왜 길러야 하나? 넉넉지도 못한 터수에 이런 개는 없애버리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그런 충고를 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르는 말이다. 이 병신 개가 주인을 위해서 얼마나 큰 공을 세우고 있는가를 알면 감히 이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한다.

제 구실도 옳게 못하는 개 한 마리를 몇 해 없이 기르고 있는 어질고 착한 주인, 세상에는 수십만 원 가는 종견(種犬)을 사들여 교배료만으로도 착실한 돈벌이를 하는 이식(利殖) 애견가도 있다. 그러나 이 개의 임자는 그런 타산과는 인연이 없고, 집을 지키자는 실용적인 목적과도 거리가 멀다. 공밥을 먹여가면서 이 무용지물을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오로지 떼어버리지 못하는 사랑’ ‘인정 그것이다. 그런 착한 마음씨가 아니고서야 누구라 일삼아 이런 개를 그르랴.

이 늙은 개는 문간을 찾아드는 손님들에게 주인의 덕성, 후한 마음씨를 일러주고 깨닫게 해준다. 한솥밥의 대가로는 지나칠 공적이라 할 것이다. 개도 주인도 물론 그런 것을 의식하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한다고 해서 누구나 될 노릇도 아니다. 그러기에 이 작위(作爲) 아닌 기브 앤 테이크는 예기치 않은 데서 인생의 조화(調和) 그것과 일치되고 부합된다.

어떤 이에게 이 병신 개 이야기를 했더니 반문 왈, ‘그럼 그런 개를 없애버린다고 다 인정 없는 영악한 주인일까 보냐?’ 그도 일리 있는 말이다. 주사, 한 대로 편하게 가게 하는 것이 오히려 옳은 인정일지도 모른다.

동물 애호 박애주의의 센티멘털을 분석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제 나름으로 사랑하는 길수가 다르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것과는 별문제로 여기서는 다만 제 구실 못하는 병신 개로도 제 구실 이상의 이런 보수를 주인에게 치르고 있다는 사실만을 얘기했을 뿐이다.

소문난 악처라는 것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마누라 크산티페는 악처의 총대격으로 이름이 높고,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부인도 그러한 의미로 유명하다.

귀족 출신에다 교양도 있었다는 크산티페는 기질적으로 약간 자존심이 강하고 교만했을지는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밤낮 거리로 나가 군중들 앞에서 설법이나 하고 다니는 남편 소크라테스가 마음에 탐탁했을 리는 없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살림을 돌불 줄 모르는 이런 남편이 집안에서 우대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바라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크 여사가 한바탕 군소리 잔소리로 바가지를 긁다가, 그래도 들은 체 만 체 딴전을 하고 있는 남편 소크라테스에게 물을 한바가지 둘러씌웠다. 소 선생 태연자약 왈,

뇌성벽력이 치더니 비가 쏟아지는 구나.”

그 얘기는 악처 크산티페를 부각시키느라고 자주 인용되는 일화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손해를 보는 것은 여사요, 소크라테스 선생 쪽은 아니다.

하루아침 물 한바가지 둘러쓴 덕분으로 소크라테스 선생은 그후 2천 몇백 년토록 관후대도(寬厚大度)의 이름을 누려왔고, 마누라인 크산티페는 천하에 없는 악처의 표본으로 성명(盛名)을 떨치게 되었다.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랴나 본저(本邸)를 나와 이름 없는 한역(寒驛)에서 급성폐렴으로 외롭게 죽었다. 팔십 노인인 남편으로 하여금 집을 나오게 한 악처라고 해서 그의 부인이 세인의 힐난과 지탄을 받게 된 연유도 짐작이 안 가는 바는 아니다.

만약에 톨스토이 선생이 대지주 대문학자가 아니고, 시정의 가난한 할아버지였던들 주책없는 늙은이의 망령쯤으로 돌려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없이 인심은 죽은 자에게 관대하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가혹하게 마련이다.

하물며 노대가(老大家) 톨스토이 선생에 있어서랴! 전하는 바로는 톨스토이의 원고는 워낙 악필(惡筆)이라, 부인 하나밖에는 그 글씨를 알아낼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다. (일설에, 당시의 상류계급의 풍조로는 남이 알아보기 쉽게 글씨 쓰는 것을 창피스러운 일로 아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어느 희곡 대사에는, ‘창피하지만 녀석이 알아보도록 써주었지.’ 하는 한 대문이 있다는데,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러시아의 상류층은 프랑스어를 전용하도록까지 그쪽 문화에 쏠려있었다.)

능숙한 문선공도 읽어내지 못하는 유별난 글씨를 홀로 그 부인만이 알아내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부인이 남편인 톨스토이를 이해하고 존경했던 증거이기도 하다.

애정의 뒷받침 없는 이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삼단 논법으로 해서 톨스토이 부인은, 남편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알뜰한 아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 같은 대작이 모두 그 부인의 판독(判讀)과 정서(淨書)를 거쳐서 책으로 되고, 세상에 남겨진 것이고 보면,  악처설도 억울한 누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크산테페나 톨스토이 부인에 공통된 미덕은 악처라는 누명을 감수함으로써 남편의 덕성을 몇 갑절 더 크게 클로즈업한 그 공덕이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을 죽여서 남편의 덕을 나타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악처는커녕 세상에도 드문 현처(賢妻)들이다.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지만 일본에 마키 이쓰마, 자니 조지, 하야시 후보라는 세 필명을 가진 작가가 있었다. 스릴러의 시대소설에 욕조(浴槽)의 신부, ‘텍사스 무숙(無宿)’ 같은 엽기 스토리까지 마구 써갈겨 한때 일본의 대중 독서계를 석권했다.

이 작가의 문전에 드나드는 잡지사, 신문사의 기자들을 응대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부인이었다. 고료(稿料)니 마감 기일을 두고 딱딱하고 영악하기로 정평이었다. ‘선생은 좋은 분인데 그놈의 부인이 틀렸어.’마키 이쓰마 부인이라면 어느 기자 없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심지어는 남편을 마구 혹사해서 적어도 수천만금을 따돌렸으리라는 소문까지 났다.

그러나 모두 헛소문이었다. 시댁이 짊어진 거액의 부채를 갚느라고 부인 혼자서 갖은 악명(惡名)을 둘러쓰고 악전고투했다는 사실이, 40대 중반에 남편인 마키가 급사한 뒤에야 알려졌다.

수천만금은 고사하고, 살던 집 한 채밖에 남은 자신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악처 아닌 이런 고마운 악처도 있다.

착한 아내, 현숙한 부인으로 소문난 가정일수록 남편의 그림자는 희미해진다. 현처(賢妻) 우부(愚夫)를 말하는 준마(駿馬)가 치한(癡漢)을 태우고 달린다.’는 문구는 곁에서 부러워하는 제3자의 익살만이 아니다.

준마를 타고 보면 여간 따위 대장부도 바보 녀석으로 보여 버리기 쉽다.

치한은 고사하고, 자칫하면 남편은 그 착한 아내’ ‘현숙한 부인 가해자(加害者)’로 먹혀버리기 일쑤다. 소문난 악처들은 남편에게 물바가지를 둘러씌워서 남의 규탄을 받을망정 남편을 가해자로 몰아넣지는 않는다.

또 하나의 리베이트’- 악처를 모셔 받드는 마음씨 너그러운 선량한 남편의 주위에는 언제나 동정과 호의의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도 판에 박은 정석(定石)이다.

이상은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문난 악처- 몸소 악처의 낙인이 찍혀 가면서 실상은 남편의 밑거름이 되는 그런 순교자들을 두고 하는 말, 우둔과 주책, 허영과 무지로 해서 사내를 골탕 먹이는 그런 진짜 악처와는 상관없는 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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