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선생님에의 추억 / 김효자

 

 

 

C선생님이 우리 학교 교장으로 부임해 오신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해방 후의 혼란이 이제 막 가라앉으려 하던 무렵이었다.

부임해 오시자 맨 처음 하신 일은, 한문으로 쓰인 학교 간판을 내리고 쪼록쪼록하게 한글로 쓴 새 간판을 내거는 일이었다.

나는 학년이 높아지면서 황진이와 송강과 고산을 선생님에게 직접 배웠고, 숙녀들이 사투리를 써서 되겠느냐는 점잖은 핀잔에 우리들은 남도 사투리를 버리고 모두 쪽 뺀 표준말만을 썼다. 조회 때 교장 선생님이 인사만 받고 단에서 내려가시면 서운하고 그렇게 사흘만 계속되면 대표들이 교장실에 쫓아가 말씀을 들려주시라고 어리광 같은 항의를 제기하였다. 이렇게 갈망하여 듣던 훈화였건만, 말씀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할 수가 없으니 이상한 일이다. 다만 사운사운 정답게 들려오던 고운 말과(그의 말은 사실 언제나 시 같았다) 폐항이 되어가는 외로운 항구도시에서 그나마 폐허 같은 공장 부지에 학교를 일으키며 공부하던 우리들에게 한국에서는 제일 잘난 여학생들이라고 하는 긍지를 심어주신 일들만을 기억한다. 교정 구석에는 채마밭을 만들어 토마토, 가지, 오이 들을 화초처럼 곱게 길렀는데 이런 구상이 모두 선생님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수년 전, 서울에서 한글 전용을 내세워 간판을 내리고 올리고 할 때, 나는 25, 6년 전의 선생님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라는 말이 나오고 학생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보며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던 채마밭을 추억하였다.

무도회의 수첩인가 하는 영화를 단체 관람하고 돌아온 이튿날, 교감 선생님이자 우리 담임선생님이시던 K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책상을 내리치며 호통을 하셨다.

그 영화가 단체 관람할 성질의 것이냐, 교장실에 쪼르르 쫓아가서 영화 보여달라고 또 조르겠느냐.”

하는 요지의 호된 훈계를 한 시간 남짓 듣고, 모두 눈이 붓게 울고 있었다. 꼬장꼬장한 K선생님은 양심적인 애국자였고 정의감에 불타는 역사 선생님이셨다. 사색당쟁을 가르치실 때 얼굴이 파랗게 질리도록 흥분했었는데, 우리는 이때 처음으로 동족애로 향한 증오를 배웠다.

그 후에도 한 달에 두세 번씩 가던 단체영화 관람을 계속했는지 어쨌는지 기억할 수는 없으니, K선생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지금 생각하면 아슬아슬하게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다.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세계사 시간에, 우리는 밖에 나가 걷자고 선생님을 졸랐다. 선생님은 그래 한번 그래 볼까. 하시고 모두들 외투를 입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성당이 있는 이국풍의 동산을 뒷길로 도는 호젓한 외곽도로를 한바퀴 돌아서 돌아왔다. 다음 수업시간의 반까지 잘라먹은 눈길 산책이었다. 이 모든 것이 C교장선생님 밑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음을 나는 훗날 어느 학교 선생이 되어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공부에 있어서도 어느 학교 학생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고 예비 숙녀로서 문화에 젓는 환상에 취해 있었다. 실력이라는 것보다는 신념이라는 것이 더 크게 운명을 좌우한다고 C선생님은 믿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6·25전쟁이 나자, 나는 C선생님과 같이 피난을 갔다. 시골에 있는 나의 당숙집이 선생님의 처가였던 까닭이다.

애가 타서 하얗게 바래버리는 것 같은 공백 기간이 지나고 죽창 끝에 피비린내가 도는 살육의 여름이 왔다. 이 여름에 우리는 사람의 눈길을 피해 되도록 인적이 미치지 않는 먼 산으로 땔나무를 베러 다녔다. 소일삼아 이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허술한 옷을 걸치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진짜 머슴처럼 억척같이 나무를 해서 큰 둥지를 만들어 자라목이 되게 머리에 이고 집에 돌아오곤 했었다.

이미 선비로 굳어버린 선생님의 손에 낫은 어울리지도 않았다. 선생님은 어설픈 솜씨로 정원수를 전지(剪枝)하듯 나무를 베고 있었다. 그 서투른 솜씨를 웃었더니 오히려 익숙하게 척척 풀섶을 깎아가고 있는 우리를 보고 언짢은 표정이셨다.

이런 것은 진달래나문데 이렇게 싹뚝 깎아버리면 내년 봄에 어느 가지에 꽃을 피우겠느냐는 것이다. 내일의 내 목숨도 장담을 못하던 때에 내년 봄 피어날 진달래꽃을 염려하는 이러한 선생님을, 생활적인 S형은 센티멘털리스트라고 흉을 보았지만 이것이 바로 그의 몸에 밴 생활 태도의 편모이기도 하였다.

선생님과 같이 산에 가던 그날은 돌아오는 길에 물통거리에서 쉬었다. 바위 틈에서 솟는 물이 낭떠러지로 작은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움푹 패어 들어간 낭떠러지 밑으로 내려가 물을 맞게 되어 있는 곳이다. 이 작은 폭포를 에워싸고 잡목과 찔레덤불이 우거져 있었다.

노을은 마지막 빛을 거두려 하고, 새들이 잠자리를 잡느라 푸드득거리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뭇가지에 여기저기 매달린 작은 주머니를 가리키며 저걸 뭐라고 부르는지 아느냐고 물으셨다.역신에게 치성드리는 액땜 쌀주머니라고 했더니, 그것을 새미쌀이라 부른다고 가르쳐주시며 재미난 설명을 덧붙이셨다.

새모이쌀새뫼쌀새미쌀 이렇게 변한 말인데, 애초에는 역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들을 위한 모이로서 매달기 시작한 것이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머지않아 눈이 깊어지면 낟알 하나 얻을 수 없을 터인데, 먹이를 저장할 줄도 모르는 저 철없고 귀여운 것들을 위해 이런 방법을 썼을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훗날 국어사전을 들춰보아도 새미쌀이라는 단어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어원을 규명하는 데 특히 관심을 기울여온 국어학자였기 때문에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으리라고 믿는다.

선생님은 또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앞뒤를 따지거나 자로 재거나 하는 일 없이 누구나 북돋아주고 편의를 제공하셨다. 뜻밖에도 6·25 때 월북하여서, 모두를 경악케 한 A선생을 교장 성생님이 오랫동안 집에 두고 보살폈던 것은 오로지 그가 재능 있는 작곡가였다는 그 한 가지 이유에서였음을 나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는다.

그리고 무명시인 P선생을 병원에 입원시켜 세태의 시달림에서 보호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것을 모두 해방 후의 혼란기에 있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지나고 갈망하던 자유를 되찾게 되었을 때, 선생님은 미워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었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셨다.

학교를 물러나서 산비탈 초가집 단칸방으로 기거를 옮겼을 때, 식구들도 들어앉기 어려운 거기엘 우리는 자주 찾아다녔다. 이때 선생님은 향토교예지 같은 잡지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예나 이제나 이런 것이 돈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세 들었던 단칸방 흙벽이 비바람에 무너져 내려앉아 버려서 임시변통으로 거적을 쳐서 가을바람을 가리고 지내신 적이 있었다.

사내가 집 하나 못 얻어서 이게 무슨 꼴이냐는 소설가 P여사의 말에, “그럼 날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도둑질을 하란 말이오? 자랑 될 건 없지만 피난민에 비하면 이도 크지 않수.”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는 눈을 뜨면서, 집 걱정과 돈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적 하나 두고 이웃하여 사는 마을 아낙네들의 주고받는 말에 귀를 종귀고 있다가 친정이고 뭣이고, 어찌 그리 메강스러울 것이오.’하는 대화에서 메강스럽다라는 말을 건져올리고 기뻐하고 있는 철없는 자기 모습을, ‘철없는 사람이라는 수필로 쓰신 적이 있다. 그러한 선생님 댁에 우리들은 되지도 못한 글줄을 써가지고 찾아가 시니 문학이니 하고 번거롭게만 해드리고 돌아오곤 하였다.

돈이라는 글자에는 묶음표를 질러 위아래 글자에 추한 땟국이 번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 선생님의 청빈은,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비로 쓸어버린 듯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그 깨끗한 뒷자리만큼 맑았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도랑을 재치있게 넘나들면서 명성과 부를 함께 누린 대가들도 허다하지만, 선생은 홀로 그 도랑 저편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있다가 이것도 저것도 이룬 것 없이 빈손으로 가셨다.

선생님이 가신 지 어언 10, 가난이 자랑일 수는 없지만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던 선생님의 꼿꼿한 모습이 날이 갈수록 선명하게 마음에 되살아온다.

지금은 모두가 내일 잘살기 위해 오늘을 못사는 듯한 시대다. 내일에 거는 것은 부요, 오늘에 잃는 것은 그보다 몇 배 더 존귀한 것들이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생활 태도도 잘사는 방식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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