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베짱이의 마지막 연극 / 김우종
그해 여름이 유난히 길고 무덥게 느껴졌던 것은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구치소에서 돌아온 후 나는 대학 강단에서도 물러났다. 출판한 책이 긴급조치법으로 판매 금지가 되자 글 쓸 일도 드물어졌다. 그리고 가깝던 친구의 전화도 거의 끊기었다. 기약없는 긴 방학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도 가끔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놓친 열차는 아름답다고 하듯이 흘러가 버린 과거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일까.
그렇게 무덥던 여름도 거의 다 가고 9월의 문턱으로 들어설 무렵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환한 형광등 불빛을 찾아서 방으로 귀여운 불청객이 날아들었다.
해직 후 학교 앞 회기동 집을 팔고 멀리 강남의 상도동 약수터로 이사를 왔더니 시골집처럼 아무나 마음대로 마실을 오나 보다.
곤충들이 밤에는 밝은 불빛을 찾는 것이 당연하지만 행여 밤바람이 차져서 내 방으로 들어왔으려니 하는 생각도 나니 그렇게 방문한 베짱이가 가여운 생각도 들었다.
쓰고 싶지도 않은 국어 부교재 원고를 돈 때문에 맡아서 쓰고 있던 나는 장난을 하고 싶어졌다. 그 녀석을 잡아서 모시옷 날개에 색동옷 무늬를 입혔다. 빨강, 남색, 노랑, 초록 등 유화색감을 살짝 칠한 것이다. 그리고 마당 풀밭에 그대로 놓아 주었다.
웬일인지 베짱이는 다른 집이나 약수터 산 속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해바라기 앞에도 앉고, 호박잎에도 앉고, 장미 가지에도 앉으면서 우리 색동옷 귀염둥이는 마당에서 늘 혼자 잘 놀아주었다. 어쩌다 안 보이면 궁금해서 이곳저곳 샅샅이 찾아보다가 단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애를 먹이다가도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눈에 띄도록 색동저고리를 입혀 놓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 녀석은 몸을 숨겼다가도 내게 들키고 마는 것이었으니까.
"아빠, 베짱이는 여기서 살다가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긴, 가을이 되고 찬 바람이 불면 멀리 떠나버리는 거지."
"어디루."
"그냥 죽는 거야."
딸은 개구리 도마뱀 같은 것도 잘 만지고 곤충들을 참 좋아하는데 이렇게 죽는다는 말을 듣자 좀 심각해진 표정이었다.
딸이 그 날 이후 베짱이에 대해서 매일 생사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자 나도 그 녀석이 밤새 안녕하셨는지 아침마다 인사를 해주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그 녀석이 또 내 방으로 들어왔다. 색동옷을 입힌 후 첫 번째 방문이었다. 그런데 창문에 앉아 있던 녀석은 놀랍게도 내게 멋진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쩍 쩍' 하며 씁쓸하게 입맛 다시는 소리만 내기에 혹시 날개에 유화색감을 칠해서 악기가 망가진 탓이려니 했다. 한데 좀 있다가 날개를 조금쯤 엉거주춤하게 든 상태를 유지하면서, 기막힌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쩍 쩍'한 것은 본격적인 연극을 하기 전의 조율이었을까.
베짱이의 연극은 엿장수의 경쾌한 가위질 소리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발사가 잘 드는 가위로 치렁치렁한 머리를 사정없이 삭뚝삭뚝 잘라버릴 때의 소리를 더 닮고 있다. 그래서 더 짜릿한 매력을 지닌다. 그리고 어쩌면 그토록 소리가 경쾌하고 청아하고 시원할까.
그렇게 울던 베짱이는 관람석에 앉아 있는 내가 너무 유심히 보고 있어서 멋쩍어진 탓인지 푸르르 날라서 전등 줄에 동동 매달린다. 형광등과 백열등과 발갛고 작은 등을 필요에 따라서 조종하는 가는 줄에 매달려서 이번에는 그네를 타는 것이다.
그러던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베짱이는 방 안에 없었다.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바깥의 풀밭을 뒤져봤다. 아직 서리 내릴 때는 아니지만 밤새 풀잎에 내린 이슬이 차가웠다. 나는 그 녀석이 숨을 만한 곳은 모두 찾아봤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도 귀여운 색동저고리의 행방은 묘연했다.
혹시 사마귀에라도 잡혀 먹인 것일까.
내 집 뜰에는 커다란 사마귀가 한 마리 있다. 지난 번 아주 무덥던 어느 날 그의 등에는 자기보다 훨씬 날씬하고 작은 다른 사마귀가 업혀 있었다. 수놈이 올라타고 사랑을 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들의 사랑행위를 너무 들여다보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원고 여러 장을 더 쓰다가 지쳐버린 나는 그들도 이제쯤은 지쳐서 서로 떨어져 등을 돌리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그들이 있던 장소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나는 너무도 어이없는 광경에 기가 막혔다. 암놈이 한 시간 전의 자기 '남편'을 머리부터 목덜미까지 다 먹어 치우고 이번에는 '등심'을 뜯어 먹을 차례가 아닌가.
이렇게 왕성한 식욕과 잔인성 야만성을 두루 갖춘 사마귀이니 우리 색동저고리도 혹시 그놈한테 걸려들어서 벌써 그의 뱃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분개한 나는 남편을 잡아먹은 죄인을 당장 우리 집 낙원에서 추방해 버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목덜미를 잽싸게 틀어진 다음 담 밖으로 힘껏 던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후 그는 다시 우리 풀밭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를 또 추방했다. 그 후 그는 또 스며들었을까?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는 음흉하게 늘 몸을 숨기고 있으니까.
그러면 베짱이의 행방불명은 분명 이놈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어쨌든 베짱이는 그날 저녁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하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찾아와 모시옷 날개를 비비며 지금 이날까지 내가 잊을 수 없는 명곡을 들려준 후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그와의 만남이 있은 후 6년이 지나서 나는 복권이 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매우 바쁘게 지냈다.
대학 강의 외에도 방송 출연, 집필, 강연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다. 나는 인기 있는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이렇게 바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 사회가 내게 입혀 준 색동옷을 굳이 거부하지 않고 적당히 현실에 순응하며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강제로 입히는 색깔의 옷을 거부하며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하게 해준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에 이르러 옛날에 내가 베짱이와 만났던 시절이 다시 그리워지고 그가 행방을 감춘 수수께끼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때 베짱이는 정말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그것은 자연사일까. 아니면 사마귀에 의한 타살일까.풀밭 어디엔가 음흉하게 목을 감추고 숨어 있던 사마귀는 내가 베짱이의 연주를 듣고 있어 있었을 때 그 역시 예민한 촉각을 세우고 눈알을 굴리면서 베짱이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서히 방 안으로 접근해서 그날 밤 베짱이를 체포해 갔든지 아니면 밖으로 나오자마자 덮쳤을 것이다.
사마귀는 발자국 소리가 없다. 색깔도 풀빛과 꼭 같은 위장색이다. 그의 접근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리고 은밀히 먹이에게 접근한 그는 길다란 목을 뒤로 빳빳하게 제키고 상대를 노리다가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내게 접근했던 그 사람도 그랬다. 그는 소리 없이 교내에 스며들어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대학원 강의 도중에 잠깐 물을 마시러 휴게실에 들어설 때 내 앞에 우뚝 다가섰다.
목을 빳빳하게 뒤로 제키고 나를 노려보던 그는 잽싸게 굵은 팔로 내 팔을 끼고 밖으로 나가 지프차에 태웠다. 학생은 물론이고 교내의 아무도 내가 그렇게 사라진 것을 몰랐기 때문에 아내도 울면서 며칠동안 나를 찾아다닌 것이다.
나는 그가 언제부터 내 동태를 감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어디엔가 몸을 숨기고 있다가 특별한 먹이가 나타나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가 접근한다.
특별한 먹이는 다름이 아니다. 베짱이처럼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그들의 먹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두 벙어리로 만들어 순종을 강요한다. 그리고 자기네가 입혀준 색동옷을 입고 그냥 소리 없이 제한된 공간에서 애들처럼 놀아주기만 하면 당장은 크게 해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나의 베짱이처럼 침묵을 깨고 대담하게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게 되면 그는 공격의 표적이 되어 간첩으로 날조되기도 하고 그냥 영원히 행방불명이 되기도 한다.
우리 집 마당의 베짱이도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입혀준 색동옷을 입고 살았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멋진 소리로 밤의 정적을 깨버린 것이다. 용기 있게 부르짖는 자유의 소리라서 그토록 경쾌하고 맑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 혼탁한 세상을 온통 맑게 해줄 듯한 멋진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려준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사라졌다. 한 여름 살다가는 짧은 목숨을 그는 그처럼 더욱 단축시킴으로써 오히려 영원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노년기에 이르러 지난날의 그 무덥고 긴 여름과 베짱이를 되새기며 그 시절이 그리워지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그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한 때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나 역시 그 시절엔 내 가녀린 모시옷 날개를 비비며 비록 작게나마 '사마귀' 들이 있는 곳에서 내 소리를 내고 살았기 대문에 그 무덥고 길던 여름이 그리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