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산책자의 꿈 / 장 자크 루소

  

들은 아직 녹색으로 덮여 있으나, 이곳저곳 나뭇잎이 떨어진 곳도 있고 이미 사람의 그림자는 보기 힘든 전원의 풍경은 고독의 쓸쓸함이 깃들고 추운 겨울을 연상하게 했다. 그 풍경은 나에게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야릇한 감정을 자아내게 하였고, 그 인상이 나와 같은 나이의 사람이 지닌 운명과 너무나 흡사하기에 나는 그것을 내 자신과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죄 없는 불우한 생애의 황혼기에 선 내 모습을 거기에서 발견했다. 영혼은 아직 싱싱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고 정신은 여전히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건만, 이미 슬픔으로 퇴색되었고 수심에 시들어 병들어 있다.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고독한 인간이 된 나는 초겨울의 차가운 얼음에 몸을 떨기 시작하였다. 나의 낡아빠진 상상력도 이제 내 마음속에 화려한 장식으로 나의 고독을 위로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이승에서 나는 무엇을 했느냐? 나는 살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산 것도 없이 죽어간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니다. 나는 나를 만든 조물주에게 선행(善行)의 선물을 가지고 갈 수 없다.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 보람은 없었지만, 남에게 배반을 당하였을 때 그것을 선으로 대했던 나의 의지의 선물, 남의 모욕과 냉혹에 대한 인내의 선물을 갖다바치겠다' 나는 이처럼 내 영혼이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고보았다. 나의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온갖 애정, 부드럽고 맹목적인 애착심, 이 몇 년 동안 나의 정신을 길러준 슬픔과 위로에 가득 찬 사색 등을 나는 기꺼이 회상해보았다.

 밤은 깊어갔다. 밤하늘의 별들, 어두컴컴한 풀밭들이 눈에 띄었다. 이러한 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만족감이 나의 감각에 감미롭게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런 정도밖에 내 자신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에 나는 새로운 삶에 깨어나고 있었다. 겨우 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의 전부가 되어 있는 것 같다. 나의 의식은 현실의 한 순간에만 있고, 아무것도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다. ''라는 개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관념은 전혀 없으며, 조금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의식은 또 어디에 있느지도 모른다. 아픔도 근심도 불안도 느끼지 않는다. 피가 물 흐르듯이 흘러내리고 있지만, 그것을 보고 그 피가 자기 피라는 것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온몸 속에 황홀하리만큼 고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껏 경험한 쾌락 중에서 이 고요함에서 오는 기쁨에 비길 만한 더 세찬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음을 나는 그후 가끔 상기했다.

역경 속에서나마 우리들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경이란 많은 사람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지 모른다. 과실을 제해놓고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일이 없지만, 과실을 범하기 쉬운 자신의 약한 마음을 꾸짖고 스스로 위한해야 한다.

 그것은 나 자신 계획적으로 악을 행할 마음을 한번도 가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슬픈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끝에 모든 것을 절망 속에 빠진 숙명이라고 단념하고, 나는 명랑한 마음과 평온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되찾았다. 나는 나날의 생활에 있어 지나간 날의 생활을 기쁨으로 생각하고, 앞으로의 불행한 생활은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원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정해진 행복한 생활을 가져다 준다. 가끔 지적(知的)인 즐거운 일에 종사하며, 그 속에서 감미로운 감각을 느끼고 자기 정신과 관능을 의탁하며 때로는 내 감정에 알맞게 만들어낸 공상의 아이들과 장난을 하면서 감정의 흡족을 느끼고 있다. 고독하게 있는 자신에 만족하면서 그것만이 나에게 주어진 당연한 것이라고 느끼면서, 그 행복감을 즐기며 하루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모은 일은 나 자신의 사랑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그 속에 자존심 따위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사람들이 있는 데서 거짓이나마 동정과 찬사, 달콤한 언어들을 들을 때에는 지금도 마음이 끌린다.

 그럴 때면 내 마음 속에는 자존심이 살며시 들어온다. 얇은 천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속의 증오와 적의를 느낄 때면 고민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우열한 인간들의 놀림감이 되어 있다는 의식을 느낄 때면 그 고민은 더하여 소년 같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존심 때문이며, 속으로 바보같이 느끼면서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한 그들의 무례한 태도, 조롱하는 듯한 눈초리를 견디어 나가는 데에는 상상 밖의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관능의 지배를 받고 있는 나로서는 어떤 일이든 그 인상에 거역할 수 없었고 대상이 관능에 작용하는 이상 내 마음은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 원인이 되는 감각이 있는 동안에만 예속할 뿐이다.

 나를 증오하고 있는 인간과 같이 있으면 내 마음은 심한 동요를 느낀다. 그러나 그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면 그 인상도 사라진다. 그 사람이 없어지는 순간부터 나는 그 사람을 생각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상상한들 소용이 없다. 나는 그들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현재 느끼고 있지 않은 괴로움은 내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 눈앞에 없는 박해자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생활에 있어서 단 하나의 괴로움은 관능이 심정에 끼치는 이 작용 뿐이다. 아무와도 만나지 않을 때는 나는 운명을 생각지 않는다. 나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을 때 나는 행복하고 만족한 기분으로 있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타격을 받지 않을 때란 매우 드믈며,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 있을 때, 사람들의 태도와 이상한 시선을 느낄 때, 또는 독소가 있는 말투, 혹은 나에게 악의를 가지 자와 만났을 때, 나는 그 사실에 부딪쳤다는 순간적인 의식만으로 벌써 마음이 질리고 불쾌한 나머지 절도할 지경이다.

나는 파리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집을 나서면 나는 벌써 전원과 고독 속에 들어간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멀고 또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만난 온갖 불쾌한 환경들이 내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겨우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에는 벌써 그날 하루의 반이 고민 속에 지난 것이다. 그렇지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것만도 불행중 다행인 것이다.

 간사하고 악독한 인간들이 우글거리는행렬로부터 빠져나왔다고 느낄 때에 나는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자기자신이 나무 그늘이나 푸른 들판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면 나는 내가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낙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며 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솟구쳐오르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항상 변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세상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선물인 것 같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흐름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것이건 변하지 않는 모습을 지닐 수 없게 되어 있다. 우리들 주위에 있는 것은 예외없이 모두 소용돌이 속에 있으며, 나 자신도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오늘 사랑하고 있는 것도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나 자진있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들 생활 속에 행복을 원하는 그 자체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일지적이나마 정신적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을 즐기자. 우리들의 사소한 과실로 그 즐거움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장 자크 루소(Rousseau, Jean Jacques,1712~1778).프랑스의 사상가, 문학가. '에밀' '고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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