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憂愁)의 일기 / 키르케고르
시인이란 무엇인가. 가슴에 심각한 고민을 안고 탄식과 흐느낌을 마치 아름다운 노래같이 읊을 수 있는 입술을 가진 불행한 인간을 말한다. 그들은 마치 놋쇠로 된 황소 안에 갇힌 채 화염에 타서 죽은, 그리스의 폭군 파라시스에 희생된 불행한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 가련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폭군의 귀에는 미묘한 음악으로 들리고, 그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과 같이 시인도 이와 같은 운명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인의 주위에 모여서 그에게 한 차례 더 노래를 부르라고 덤빈다. 그의 영혼은 고뇌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고집한다. 울부짖는 소리는 다만 우리들을 불안하게 할 뿐이지만 음악은 그것을 화려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나타나서 말한다.
“됐어, 미학의 법칙대로 하면 정말 그대로지.”라고. 그런데 비평가는 시인과 머리카락까지도 같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다만 마음의 고뇌를 갖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돼지를 기르는 하인으로 돼지에게 잘 이해받는 편의 시인으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느니보다 고맙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받는 최초의 가장 개괄적인 교훈 가운데 제일 문제는 아는 바처럼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는 문제다. 그것은 뺨을 치는 일이다. 인생은 이런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직도 원죄를 부정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이는 누구에게 처음으로 뺨을 얻어맞은 일을 감사할 것인가? 그 양친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은 대단히 어리석다. 그들은 자기가 지닌 자유를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자유를 요구한다. 그들은 사상의 자유를 가지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한다. 교미하는 순간에 죽여 버리는 벌레가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모든 기쁨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인생의 높고 지극히 아름다운 기쁨은 죽음을 수반한다.
나는 수많은 친구 가운데서도 가장 솔직히 흉금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시름’이다. 내가 기뻐하는 순간, 나에게 눈짓을 하여 나를 불러내서 마치 나를 그와 일심동체나 되는 것같이 다루는 ‘시름’은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장 정숙한 연인인 것이다. 내가 언제나 그를 사랑했다고 해서 무슨 이상한 일이 생기겠는가?
나는 가난한 사람이 상당히 낡은 바탕에 산뜻한 초록을 물들인 윗도리를 입고 거리를 거니는 것을 보면 말 못할 느낌을 받는다.
나는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 그러나 그보다 그 옷 색깔이 내가 어릴 때 미술이라는 고상한 예술을 처음으로 시험했을 때의 광경을 다시 보여준다는 점이 나를 가장 강하게 감동시킨다. 그 색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 가운데 하나였다.
슬픈 기분이 들지 않는가. 내가 오늘날 그토록 큰 기쁨으로 회상하는 이 색깔의 배색은 인생의 어느 모퉁이에서도 찾아낼 수 없으니까.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 가운데 이러한 색깔의 장난감을 괴상하게 채색하는 데밖에 쓸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가 많다. 한번 이 색채를 보고 나면 그 경험은 지금처럼 슬픈 인상을 남길 것이다.
세상에는 미치광이, 뜻밖의 재난에 시달리는 사람 등 스스로 인생의 나그네인 것을 알고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처럼 사랑하는 영웅의 윗도리를 언제나 잊을 수 없는 연두 빛 무늬로 염색하는 사람도 있다. 어린 시절의 배색은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이미 흘러간 시절에 겪은 화려한 생활에 대한 추억이 어두침침한 눈에 강하게 떠올라 눈부시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 행복의 문은 안으로 밀어서 열리지 않는 문이므로 부딪쳐 밀어서 열 수는 없다. 이 문은 밖을 향해서 스스로 열리는 문이므로 사람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문이다.
죄린 A.키르케고르(1813-1855) 덴마크 철학자 ‘이것이냐, 저것이냐’ ‘철학적 단편’ ‘불안의 개념’ ‘죽음에 으르는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