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 릴케
홀연히 왔다가 사라져 가는 이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아니, 시간이라기보다는 이 순간이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고요한 순간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다. 이 시작되는 순간과 경적을, 그리고 이 첫 별을, 이 최초를 말이다. 이럴 즈음 내 마음엔, 소녀가 자기만의 규방에서 홀로 일어날 때와도 같은 그러한 고요가 깃든다. 철이 들면서부터 혼자만이 차지해 온 규방 ‘그렇다. 소녀는 어느 날부터인가 철이 들기 시작했고, 그러자 이미 집안은 변해 버렸다.’ 이제 그 새하얀 규방엔 삶이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난 소녀가 늘 그렇게 열려진 창가에 다가설 때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곳엔 끊임없이 자라나는 거목들이 있고, 새들이 있다. 커다란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은 정적 속에 사라지는 듯하다.
나는 이 바람을 좋아한다. 속성을 깡그리 잃어버린 채 봄을 스쳐가는 변형된 이 바람을 말이다. 나는 이 바람이 내는 소리와 의연하게 삼라만상을 헤쳐 가는 그의 먼 몸짓을 좋아한다.
이 밤을 좋아한다. 아니, 이 밤이라기보다는 시작되는 이 밤의 기나긴 시구를 나는 좋아 한다. 그러나 아직 미숙한 나는 이 시구를 읽을 수가 없다. 이젠 이미 사라져 버린 이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나 내 마음엔 지금 비로소 이 순간이 도래하는 듯하다.
천민이여, 그대 언젠가는 사라져 갈 것이다. 제왕이여, 그대도 결국 무덤으로 한 줌의 흙으로 화하고 말 것이다. 화사한 여인들이여, 그대가 땅에 묻힌 날 그 누가 그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겠는가. 그 무엇이 영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인가.
역사는 쉽게 잊혀진다. 언젠가 기억의 잔재를 정리하게 되는 날 편지와 사진첩 그리고 리본과 꽃들, 이 모든 것은 해묵은 서랍으로부터 추방당한 몸으로 불꽃 속에 소전쟁과 평화 조약, 섭리와 우연, 그리고 만났다가 몸짓하며 헤어져가는 우리---그 거창한 사건들에게도 망각의 세월은 있는 법이다.
한 때 많은 사람들 앞에 호화롭게 등장했던 그대들도 언젠가 그 최후의 막이 내릴 때면 관객이 사라진 무대 위에 허허로이 서 있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호기심에 굶주린 자 앞에서 윤무를 펼쳤던 것이다. 비극의 윤무를 말이다.
그대들은 또한 장터에서 볼 수 있는 마술사였다. 마법의 상자에든 뱀을 그대들은 사멸해 버릴 것이다.
육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독사들을 말이다. 그 뱀들은 그대들이 부는 피리 소리에 맞춰 한 방울의 점액으로써 온갖 생명체를 사멸시켰던 것이다.
그대들은 점술가였다. 너절하게 살아 온 어설픈 과거를 한 번 회전시켜 놓고 그 속에 묻혔던 조각난 짤막한 단어들을 읊어대면서 그것이 미래라고 떠들었던 점술가였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제 창녀의 육체와도 같이 시들어 버렸다. 사치의 껍질 속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여전히 부지하고 있었다. 어린 생명들이 자라나기를 기다리느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어둠 속에서 그들을 만났던 것이고, 끝내 그 성장한 아이들에게서 다시금 향락을 취하고 말았다.
그대 거창한 사건들이여, 그대들은 이제 성병으로 전락해 버렸다. 남자의 정액을 오염시킨 그대는 임신부의 자궁에 악의 형상을 태동시켰다.
한번 존재했었기에 이젠 이미 사라져 버린 역사의 형상들이여, 그대들은 삶을 지닌 자들과는 결코 거래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대들은 거짓투성이인데다 생기마저 잃은 시체, 고독과 고난을 지닌 썩은 시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 과거의 공존체들에겐 오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진실이 결여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오해와 권태와 허식으로 포만 된 상태이겠다.
부모로부터 소외당했던 소년이나, 정원 모퉁이에서 홀로 아이들의 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소녀라면 공존 체험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개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을 이어받아 억세게 뻗어가는 공존체의 횡포로 하여 이 연약한 어린 생명들은 수없이 박해를 받아 왔다.
지금 막 형성되는 과정에 있는 이 조그맣고 연약한 생명들은 자기들이 다소곳이 간직하고 있던 고독의 세계가 박탈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얼마나 그 아픔이 컸겠습니까! 우리는 이렇듯 순진하기만 한 그들이 퇴영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슬픔 따위는 거두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고이 간직해 두었던 그들의 침묵은 어느 날 저녁의 소음 속으로 침몰해 버렸다.
그들의 침묵이 그렇게 무에로 사라져 가는 동안 소음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속을 헤치고 들어가 왕국을 건설해 놓았다.
그런데 이제 주위의 박해로 인해 사라져 가야 했던 고독이 점차 그들에게 공동의 관심사로 들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이 고독이 있는 광장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파도를 몰고 왔다. 그 파도는 고독이란 이름을, 아! 어처구니없게도 전락의 길을 걷고 있던 고독이란 이름을 소리 높여 외쳐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다시금 파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또한 모든 책자에도 이 파도에 대한 글을 싣기에 바빴다. 이렇듯 공허한 소요의 파도는 인간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가 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이 세상에 고독이 존재하기를 바라지는 않는가 보다. 그대가 마음의 문을 닫아 보라. 그러면 그들은 필시 그대의 창문 앞에 모여 서게 될 것이다. 가로수가 늘어선 공원 길을 걸어 보라. 그 때 그들은 당신에게 무한한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문 앞에 나와 앉아 있는 이웃에게, 저녁이 그대의 마음을 고요로 감쌌다고 해서 한 마디의 말도 던져 주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가 보라.
그는 당시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자기의 가족들을 소리쳐 불러 낼 것이다. 그리고는 그대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심한 경우엔 그의 자식들이 그대에게 상처가 나도록 돌멩이를 던져대기도 할 것이다.
고독을 향유하기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보다.
홀로 있기를 좋아하는 자식들을 부모는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 부모에겐 그러한 자식들이 못내 근심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들은 이미 자신의 기쁨과 애환을 느낄 줄 알고 있다. 결국 이들은 집안에서마저 적의에 찬 눈총을 받아 가며 이방인 취급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에 대한 적개심이 날이 갈수록 증대되면, 아직 어린이들은 가족들로부터 온통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인생은 시작된다. 설움의 깊은 곳에서 그렇게 이들의 운명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명이 시작되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까지는 전달되지 못하고 만다. 하녀의 잡담 소리와 자동차의 소음이 한결 더 크게 들려오기 때문일까! 그대들도 한번쯤 이들의 창가에 다가서 보라. 창 안쪽엔 고독으로 응결된 하나의 생명이 설움을 안고서 흐느끼고 있을 것이다.
불안으로 가득 찬 소녀의 나직한 흐느낌은 커다란 종소리와도 같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잠을 못 이루고 있는 이들 어린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결코 그 창가를 떠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들이 여는 창문의 소리는 나의 온 몸에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겁에 질린 그들의 손길이 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나 내겐 그들에게로 다가설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들의 고통을 잠재워 줄 수 있는 말을 나는 아직 갖추고 있지 못했으며, 또한 그들의 침묵보다 숭고한 그 무엇이 나에겐 없기 때문이다.
공연히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 나의 머리 속엔 저 고독한 무리들의 삶이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나를 밤의 심연으로부터 일깨워 주고 있다. 나를 승화시켜 주고, 나의 껍질을 벗겨주고 있다. 내 마음 한 구석엔 그들이 비쳐주는 밝은 빛이 조용히 깃들고 있다.
또 하나의 다른 공존체가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보다도 더 알알하게 내 곁을 스치는 감동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때로는 이런 생각도 들게 된다. 슬픈 자태로 창가에 서 있을 뿐인 이들 어린 생명이 어찌하여 그다지도 거대한 힘으로 나에게 그토록 사랑하는 고독을 안겨다 줄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들이 내 마음에 심어 준 고독은 삶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고독의 행로가 세월을 타는 공존체의 행로와는 방향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긴 과거 속에 쉽사리 묻힐 수도 있는 것이 고독이라 하겠다. 그러나 고독의 역사엔 종말이 없다. 따라서 고독은 소멸되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나면, 고독은 조그만 몸짓으로 미소를 띠며 다시금 일어나서는 미래로 향한 발길을 끊임없이 옮겨 댑니다.
고독이 뿜어내는 숨결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그의 혈관에서 흐르는 피의 고동 소리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도 같이 우리의 정적을 온통 뒤흔들고 있다. 고독은 우리의 어두운 밤길을 비춰 주는 별빛이다.
언젠가 그 어느 지역에 창조자 한 사람이 있어서, 몇 날 며칠을 두고 온 심혈을 기울인 끝에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켰다고 해 보자(내가 여기서 구태여 창조자를 예로 든 이유는 그들이 가장 고독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그의 작품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또는 그의 시대에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우리의 시대에 와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작품이 창작 과정에서 일으켰던 바람은 그 작품의 주변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을 스치고 나비의 날개를 타고서 새 생명을 분만하는 여인에게로까지 불어 닥친다.
여기에 있는 이 그림이, 이 조각이, 혹은 저 시작(詩作)이, 그 당시 그 작품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바람이 몰고 온 변신일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득한 시절에 살았던 한 고독한 창작자의 체취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주변을 면면히 감돌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직접적으로 아는 바는 하나도 없다고 할지라도---.
그 누가 신에게 드리는 애절한 기도를, 하나의 어린 생명이 죽어가던 날의 쓸쓸한 기억을, 그리고 사형수의 감방을, 값싼 유행가 가락처럼, 대문 여닫는 소음처럼 그렇게 쉽사리 잊을 수 있는가?
창조자의 세계에는 결코 죽음의 공포가 있을 수 없다.
나는 믿고 있다. 이미 인간은 사라져 갔어도 그들의 의지와, 어느 의미심장한 순간에 그들이 펼쳤던 손은, 그리고 먼 창가에 서서 지어보던 고독한 미소는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남을 것이라고. 고독은 이렇게 영원히 변모하는 과정 속에서 살고 있는 불사조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를 사상(事象)의 저편으로 밀어 버렸다고는 할지라도 고독은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렇다. 사상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듯이 고독은 우리 생활의 한 부분으로서 이 곳에 분명히 살아남아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독일의 시인 ‘형상 시집’ ‘두이노 비가(悲歌)’ ‘오르페우스에게 부치는 소네트’ ‘말테의 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