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물 / 조경희
수도꼭지를 틀어 조르르 흘러나오는 찬물의 시원한 감촉을 처음으로 느껴본다.
봄이 다가왔다는 안도감보다도 찬물의 시원하고 상쾌한 맛을 다시 발견한 즐거움이 크다.
무겁게,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마음이 일시에 기구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낀다.
겨울 동안 물은 물이 지닌 바 본연의 성질을 잃고 있었다. 물이 가진 그 부드럽고 맑은 아름다운 모습을 잃고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뿐 아니라 그 성질까지도 아주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물은 겨울 동안 사람의 피부를 쥐어뜯듯이 아프게까지 하였다.
전설에,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야수가 되는 형벌을 받는다든지 영원히 죽어지지 않고 수백 년을 살아왔다는, 가혹한 형벌을 연상할 수 있는 형태를 생각하게 한다. 이와 같이 물로써는 겨울은 무서운 형벌을 받는 계절이었을 것이다.
봄이 되면 흔히 꽃 피는 계절만을 찬양한다. 동면에서 깨어나는 버러지들에게 신기한 경이의 표정을 보낸다.
시각으로 느낄 수 있는 봄, 회색 속에서 연둣빛으로 번져 나가는 풍경을 찬양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무심코 손을 물에 담갔을 때 물이 주는 짜릿한 감각이란 봄이 갖다주는 어떤 풍치보다도 나에게 잊어버렸던 봄을 찾아 주는 것이다.
피부를 쥐어뜯듯이 아프게까지 하던 감각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물은 인간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부드러운 물에서 느끼는 재발견, 물은 봄이라는 계절을 가르쳐 주는가 하면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마음의 눈까지 살포시 뜨게 한다. 내가 사춘기의 소녀였더라면 이성(異性)을 알고 심문(心紋)의 충격을 받는 단순한 동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너나 할 것 없이 도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창경원(昌慶苑)의 꽃구경, 남산(南山) 허리에 어린 찬란한 꽃구름을 즐길 수는 있으나 봄의 운치를 돋우는 강이나 내는 보지 못한다.
다만 하나의 희망이라면 서울 도심에서 십여 분 동안 버스로 달리면 한강(漢江)이 있는 것이다. 물은 모든 물체를 윤택하게 하듯이 땅을 기름지게 하고 나아가 한 고을을 번창하게 한다.
나는 얼마 전 중앙대학에 나갈 일이 있어서 한강철교를 건널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아직 봄 절기가 완연하지 않은 추운 때였다. 나는 차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그것은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부산(釜山)에서 서울로 환도하는 길에 강물을 보고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은 모래사장을 파헤치고 줄기줄기 흐르고 있었다. 비록 봄날답지 않게 풍세는 세었지만 물은 평화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흐르고 있다.
물결은 바람을 타고 손풍금처럼 오므라졌다, 퍼졌다, 형형색색의 재주를 부렸다. 흐르는 파동을 헤치고 음향의 리듬이 들려오는 듯도 하다. 물은 자유의 모습 그대로다.
숲이 우거진 바위 틈바구니를 졸졸 마음 놓고 흘러내리다가 불시에 동장군을 맞아 바위틈에 끼인 채 얼어붙었던 물, 깊지 않은 냇가에 깔려서 얼어 말라 버렸던 물, 그것은 물이 지닌 흐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던 가혹한 계절이었음을 생각게 한다. 만일 물이 감각을 아는 생물이라면 겨울을 참고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물 뿐 아니라 많은 생물이 바위틈을 졸졸 흐르다가 얼어붙는 것 같은 구속을 받게 되는 형편을 연상해 본다.
새삼스럽게 발견된 일은 아니지만 항상 자연의 이치가 그대로 인간 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나는 물끄러미 물을 바라다보고 서 있었다. 태양의 따뜻한 빛이 내려 쪼이자 강가에는 입김 같은 뽀얀 증기가 서리는 가운데 조그만 보트가 몇 개 나란히 떠 있었다.
본디 나는 행복이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오고 있는 터이지만 이런 순간엔 엷은 꽃이파리 같은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마치 봄물이 얼음 속에서 풀려 나오듯 나를 얽어매려는 모든 허위와 구속 속에서 벗어나려고 꿈틀거리는 나를 찾아낸다.
봄물이여, 추운 겨울 그리고 무서운 형벌인 얼음 속에서 튀어나오듯이 나를 어지러운 속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그리고 물은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는다. 오물이라고 생각 키우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씻어주소사 빌고 싶은 마음이다.
조경희(1918-2005) 언론인, 수필가 수필집 ‘가깝고 먼 세계’ ‘우화’ ‘음치의 자장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