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만 기쁨 / 이양하
와우산에 첫눈이 왔다. 하늘에는 달이 있고 엷은 구름이 있다. 촌설도 못되는 적은 눈이지만 눈이 몹시 부시다. 강 건너 시장위에도 눈이요 멀리 흐미하게 보이는 관악에도 눈이다. 하늘을 반나마 차지한 엷은 구름도 달빛을 받아 눈같이 희다. 온 하늘에 눈이 오고 온 땅에 눈이 왔다. 라라라트랄 라라라.... 기다란, 흰 수염을 휘날리는 와우산 소나무를 올려다 보고, 달리는 달과 구름을 쳐다 보고, 달이 숨으면 멀리 관악산을 바라보고, 라라라트랄 라라라.... 나는 허둥지둥, 내 걸음은 바쁘고 내 마음은 기쁨에 뛰논다.
초라한 내 집이 오늘은 조금도 욕되지 아니하다. 산허리에 외롭게 서 있는 일간 두옥. 아니 내 집도 이렇게 아담하고 아름다웠던가. 여기도 눈이 쌓이고 달빛이 찼다. 문은 으례 닫혀 있고, 나를 기다릴 개 한마리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이것도 오늘 밤에는 조금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빈 뜰 숫눈 위에 발자욱을 내며 토방위에 올라서 쿵 쿵 한 번 발을 굴러 눈을 털고 열쇠를 꺼내 쥐니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별장을 오래간만에 멀리 찾아온 듯 모든 것이 반갑고 신기스럽다. 지금 저기 한가지로 흰꽃을 피우고 있는 들장미와 무궁화, 그것은 내가 매일 바라보는 앙상하고 메마른 그 들장미 그 무궁화가 아니다. 뜰 가에 꽃을 담북 달고 쪼르르 나란히 서 있는 조그만 황양목들도 내가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귀염둥이들이다.
이 기쁨과 신기감은 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서도 좀체로 없어지지 아니한다. 방은 확실히 내가 그제도 기거하고 어제도 기거하고 오늘도 아침 신문을 내 던진 채 남겨 두고 나간 방이다. 신문은 아직도 펼친 채로 놓여 있고, 다른 모든 것들도 여전히 두서없이 쌓여 있고 벌어져 있다. 한마디로 하면 어제나 그제나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음산하고 깨끗지 못한 방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영행을 다녀 오래간만에 비워 두었던 별장을 찾아왔다는 착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첫째 내가 거닐 때마다 쿵쿵 울리는 마룻소리가 신기롭다. 난로 안에서 탁탁 타는 장작불 소리도 확실히 보통 때와는 다르다. 타는 나무 향기가 유난히 짙고 불꽃이 한층 더 찬란하다. 가만히 귀를 기울리면 밖에서 때때로 가벼운 발자취 소리가 들려온다. 나뭇가지에서 눈이 떨어지는 소리다. 앞 무궁화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리다. 또 들린다. 저것은 아마 높은 뒤 고욤나무에서 떨어지는 소리리라. 기쁜 순간이다. 찻그릇을 올려놓자. 차 끊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로써 나의 오늘의 기쁨은 완전 하리라.
나서 자라 학교에 입학이 되고 방학 때가 되어 짐을 꾸려 가지고 정거장으로 달려 나가고, 좀더 자라 마지막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넥타이를 매고 어떤 회사나 관청에서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통지를 받고, 가합한 여성을 얻어 부만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어 금강산으로 신혼 여행을 떠나고, 또 얼마 아니하여 첫 아들을 낳고... 우리 일생의 기쁨이랄 기쁨이란 대개 이러한 것으로 다하는 것이 아닐까? 어찌하여 썼던 글이 책이 되고, 그 책이 팔려 집 하나가 생기고, 어떤 돈 많은 동무나 공공한 기관의 호의로 오랫동안 꿈꾸던 외국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고, 또는 강원도 어떤 땅에 가져 두었던 금광에서 갑자기 노다지가 쏟아져 나와서 하루 아침에 백만 장자가 된다. 이야말로 노다지 기쁨, 천의 한 사람, 만의 한 사람이나 가져 볼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는 조금도 비관 할 것이 없다. 이렇게 큰 기쁨이 아니요 조그마한 일 조그마한 것에서 오는 조그만 기쁨을 찾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범상한 일상 생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지 아니한가 한다. 이러한 기쁨은 우리가 매일 걷고 있는 거리에서도 수두룩하게 발견 할 수 있다. 지나가노라면 식료품점에서 풍겨 나오는 커피 냄새만 하여도 하룻 동안의 울분을 잊기에는 충분할 게다.
데파트 쇼윈도 안에 오늘 새로 내어 놓은 마네킹의 명랑한 포즈도 그저 지나갈 수 없는 광경이다. 그리고 철이 아닌 꽃이 담북놓인 플러리스트의 쇼윈도우로 말하면 우리 거리의 아들로서 누구나 다 깊이 감사하여야 할 하나의 큰 축복임에 틀림없다. 나는 오늘도 가던 길을 멈추고 경원 쇼윈도우에 한참 동안 붙어 있었다. 들국, 장미, 백합, 수선, 튤립, 카네이션... , 어쩌면 지금 저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가 있을까? 나도 어서 봄이 되면 내 뜰에 저런 꽃을 피워 보리라. 괭이를 들고 맨발이 되어 ... 이마에 햇살이 따갑고, 봄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이 향기롭고, 발가락 사이에 스며드는 흙이 몹시 간지럽고도 보드랍다.
여러분은 또 이러한 때를 생각해 보라. 오래간만에 좋은 기우를 만나 장기를 벌여 놓을 때, 아름다운 동무한테서 온 편지를 받아들고 피봉을 뜯으려 할 때, 거리를 걷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문득 벙글벙글 웃는 동무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어떤 모퉁이를 돌아서자 우연히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들을 때, 극장이나 영화관에서 이제 막 시작되는 종이 울리고 이어 뛰이 하고 명랑한 음악이 쏟아져 나올 때, 또는 이제 한 십분만 있으면 이 학기 마지막 종이 울리고 종이 울리면 길고 자유로운 여름 방학이 시작되려고 할 때.... 또 여러분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보라. 어린애의 조그만 주먹, 늙은 노인의 미소, 외로운 양의 눈동자, 참새의 가느다란 다리, 또는 아지랑이 낀 먼 산, 흐르는 시내. 잔디 위에 누워서 쳐다보는 아름아름한 봄 하늘. 친한 동무와의 산보와 이야기... .
이러한 것은 모두 조그마한 기쁨이나마 우리의 한때의 기분을 전환하고 우리의 그날그날을 애상과 우수에서 건져내는 큰 힘이 되지 아니할까? 그리고 이러한 기쁨이야말로 어떻게 말하면 도리어 우리 인생의 참다운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양하(李敭河 1904∼1963 ) 영문학자.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