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언 타임 / 정비석


 

 

지난여름에 나는 구라파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독의 남부 도시인 슈투트가르트라는 곳에 40여일 가량 체류한 일이 있었다. 그곳에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딸과 사위와 외손자 아이들이 오래간만에 만난 나를 간곡히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매정스럽게 뿌리치고 떠날 수가 없어, 본의 아니게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해보게 된 것이다.

아무 하는 일 없이 40여 일 간이나 허송세월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무의미한 일이기에, 나는 그 기회에 독일 사람들의 생활풍습을 알아보고, 또 독일의 명승고적들도 골고루 찾아보기 위해 사흘에 한 번 정도 관광여행을 돌아다녔다. 주로 딸네 가족들과 함께 자동차로 돌아다녔지만, 때로는 독일 사람들 틈에 끼어서 관광버스를 타고 다닌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나 마찬가지여서 독일에서도 1일 관광이니 12일 관광이니 하는 관광 붐이 대성황이었는데, 독일은 워낙 도로가 좋아서 하루에 부산 왕복 정도는 장거리 관광도 여간 많지 않았다. 게다가 남부 독일에서는 오지리니 서서니 하는 나라와도 이삼백 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다가 국경을 넘나드는 데도 신분증 하나만 보여주면 그만이어서(물론 나의 경우에는 패스포드를 보여줘야 했지만) 오지리와 서서 같은 나라에도 여러 차례 가보았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남부 독일의 명승고적지는 거의 다 둘러보았다. 그 덕택에 독일의 농촌도 많이 돌아본 셈인데, 어디를 가나 나를 감동시키는 일이 한두 가지만이 아니었다.

이제 그 대표적인 몇 가지를 열거해보면, 첫째는 독일은 어디를 가도 아름드리 수목이 울창하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생활수준과 문화 수준이 거의 같다는 점이었고, 셋째는 사회생활의 실서가 놀라울 정도로 안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밖에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그만 줄이기로 하거니와, 그러나 그들이 시간을 지키는 데 엄격했던 점 하나만은 꼭 말해두고 싶다.

언젠가 나는 독일 사람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어느 한국 유학생이 독일의 저명한 학자를 만나려고 전화로 면접 신청을 했더니, 그 학자는 오후 세시에 집으로 찾아오면 만나주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래서 그 한국 유학생이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찾아갔더니, 그 학자는 약속 시간보다 왜 10분이나 일찍 찾아왔느냐고 하면서 10분 동안은 응접실에서 기다려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것은 독일 사람들이 시간을 잘 지킨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한 일종의 꾸며낸 이야기였거니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그들과 여행을 같이 해보고 그 이야기는 결코 누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관광 여행을 다닌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나와 나이가 비슷한 6, 70대 노인 부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젊은이나 늙은이를 막론하고, 관광지에 도착하여 자유 시간을 주면서 버스가 몇 시에 출발할 테니 그리 알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만 되면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이 버스에 올라 있어서, 버스는 지체 없이 그대로 떠나는 것이었다.

그 한 가지로만으로도 나는 독일 사람이야말로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며 제2차 대전에서 여지없이 패망했던 독일이 오늘날 또다시 세계에서 한두째를 다투는 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도 바로 그 시간 엄수 생활에 있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라. 4, 50명의 관광객 중에서 한 사람의 지참자(遲參者)도 없었다는 것은 그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그러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한 덩어리로 엉키면 무슨 기적인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거기에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과 함께 관광할 때의 실태는 어떠했던가. 나는 구라파 여행을 할 떼에는 한국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관광단에 참가했었다. 그리하여 보름 동안을 같이 다녔는데, 동행자들은 거의 전부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건만, 그 보름 동안 버스가 예정된 시간에 떠나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30분쯤 늦어서 출발하는 것은 오히려 빠른 편이었고, 대개는 한 시간쯤 늦어야만 떠났던 것이다. 가만히 보면 시간에 늦는 사람이 2, 3명내지 4, 5명씩 으레 있게 마련인데, 그 몇 사람 때문에 40여 명의 일행이 버스 안에서 헛된 시간을 보내야 하니, 세상에 그처럼 개탄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소위 코리언 타임은 구라파에 가서도 여전히 세도를 부리고 있었는데, 늦게 온 사람이라고 해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처럼 늦어진 것이 무슨 불가피한 사정에서 그랬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대게는 하찮은 선물 한 가지를 사기 위해 40여 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랑곳 아니하고 천연스럽게 늑장을 부리고 있었으니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국내에서 무슨 회합이 있을 때에도, 높은 양반일수록 늦게 오는 것이 당연한 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때문에 횟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그런 양반은 늦게 와가지고 으레 바빠서 늦었노라고 말하기가 일쑤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구토록 바빠서 공식 회합에 부득이 늦어질 정도라면 외국 여행 때에 비행기에도 가끔 늦어야 할 터인데, 나는 그런 양반들이 비행 시간에 늦어서 외국 여행을 못 떠났다는 소문은 들어본 일이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높은 양반들이 공식 회합에 늦어지는 것은 권위를 세우기 위한 술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런 일로 권위가 선다고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프리카의 흑인국에서는 정부에서 외국 사신들을 파티에 초청해 놓고도 한두 시간쯤 지나야만 파티를 열기가 예사라고 들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그만큼 후진국의 증거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후진적인 현상이다. 시간을 지키지 않으려면 애초부터 시간 약속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이제는 수출고가 백억 불을 넘었고, 국민소득도 1천 불을 상회하고 있으니,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코리언 타임과 같은 후진성을 탈피하여 시간을 제대로 지키는 기풍을 진작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서양 속담에 시간은 발소리도 없이 걸어와 발소리도 없이 걸어간다.”는 말이 있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요, 오늘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기 자신의 시간의 귀중함을 깨달음과 동시에 남의 시간도 존중할 줄 아는 기풍을 하루바삐 조성해나가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네의 생활 속에서 코리언 타임이라는 후진성을 단호하게 추방해 버려야 할 것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