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에 만난 풍경 / 윤영


 

 

개망초를 만나다

푹 퍼진 밥알을 뿌린 듯 길섶은 희다. 보름 전 편지가 왔다. 다 같은 망초이건만 물망초는 대접받고 개망초는 앞에 접두사  자까지 달고 사는 이유를 아느냐고 했다. 아직 화답을 보내지 못했다. 자갈밭이든 길가든 그저 지 집인가 알고 사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었다. 나름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물망초보다는 억척스런 망초를 더 잊지 못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답장을 줘야 할까 보다. ‘화해 의 꽃말을 가진 그가 사람 사는 세상의 안부를 묻는다. 어제는 그대의 향기를 닮은 향수를 주문했다는 내 말에 노란 꽃술을 흔든다. 사람이 그리운 세상에서 적을 만들지 말고 두루두루 화해하고 살라는 뜻이리라. 낮에 내린 비에 밥알이 퍼져 꽃잎이 이울었다. 코끝이 찡하다.

 

달맞이꽃을 만나다

스무 살이었을까. 친구 몇 명과 계곡을 찾다가 길을 잘못 들어 군부대 안으로 들어갔다. 육군 모모 부대라는 숫자만 보일 뿐 막사는 조용했다. 더위에 지쳐 돌아갈 힘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난데없는 여인들의 무단침입에 할 말을 잃은 병사들은 기가 막혔나 보다. 손님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먹여 보내는 게 우리의 전통이었던가. 취사실에서 해주는 밥을 먹었고 연병장을 돌며 짧은 극기 훈련에 동참했다. 낯선 세계에 익숙할 무렵 어두워지는 산 속을 달빛이 덮었다. 돌아가는 길에 민가가 없으니 태워주겠다며 트럭에 타란다. 저수지를 배경으로 달맞이꽃이 흐드러졌다. 손 흔들며 밀어지는 국방색의 철모 뒤로 흔들리는 것은 달빛이었을까. 꽃이었을까. 지금 눈감아도 떠오르는 막사 앞의 달맞이꽃이 천지로 피었다.

 

박하 꽃을 만나다

이파리를 땄다. 엄지와 검지로 비볐더니 박하향이 짙다. 잦은 비가 와서인지 잎에는 살이 포덕이 올랐다. 박하는 내게서 많은 것을 들추어낸다. 빈속에 소주 몇 잔 들이붓고 나면 뼈마디마다 몰아치던 짜릿함이 박하맛과 닮았음을 오늘에야 알아 버렸다. 또한, 할머니 머리맡에 놓여있던 사탕이 그러하며 몇 년 전에 본 영화 박하사탕이 그러하다. 세기말의 암울함과 도덕적 가치관의 몰락 등을 배경으로 다룬 영화였다. 이미 꿈과 사랑까지 잃어버린 마흔 살의 영화에게 과연 박하사탕은 돌아갈 고향이었을까. 이래저래 순수와 애잔함으로 떠올리게 되는 박하 꽃이 지금 겹겹이 피었다.

 

해바라기를 만나다

주말에 시댁에 다녀왔다. 어머님 가신 후 아버님은 꽃이라는 꽃은 죄다 심으신다. 울타리 밖에는 키 낮은 관상용 해바라기가 수북하다. 무뚝뚝하게 평생을 사셨으니 이제라도 어머님을 향한 해바라기를 하시겠다는 무언의 약속인가. 몇 송이 듬성듬성 낫으로 베어다가 신문에 싸서 집에 가져왔다. 항아리에 꽂아두고 잠시 비 그친 들판을 산책 중이다. 어쩌다 무리 속에서 이탈하여 혼자 피었던가. 절집 앞마당은 좁건만 잡초 무성하고 텃밭에는 깨꽃이 환하다. 저녁바람에 풍경소리 일고 외로움에 지친 아버님의 한숨 소리 귓전에 와서 부딪친다. 내년에는 또 무슨 꽃을 심어 삽작길을 밝히실까.

 

장대비를 만나다

폐타이어 공장 마당에 타이어가 수북하다. 무명 치마를 둘러 입은 백로가 검은 산더미에 앉았다. 잠시 비 그치자 산책을 나왔을까. 비가 멈춘 걸 보고 나왔건만 먼 산이 뿌옇다. 어린 시절 목덜미에서 탄내가 나도록 땅따먹기를 하고 나면 햇빛이 시들시들했다. 그런 날 저녁이면 개울이 넘치도록 큰비가 쏟아졌다. 사나흘 비가 오면 엄마는 방마다 말려 두었던 쑥을 태웠다. 마른 쑥 냄새는 눅진눅진한 당신의 마음까지도 태웠을까. 슬며시 피어오르는 연기가 곡선을 그리며 슬그머니 빠져나간 방안에서 당신은 단잠에 들곤 했는데. 이 저녁 논둑길을 걸아가면 이빨 빠진 접시에 쑥을 태워 놓고 다 큰 계집애가 어디 쏘다니다 저녁답에 오느냐 며 잔소리가 울을 넘어 들릴 것만 같다. 백로가 돌아가고 백양나무숲에 바람이 일렁인다. 굵은 비가 몰아칠 기세인지 하늘이 검다. 어린 비가 초록의 깊이를 더해가는 논둑길에서 장대비를 만나 젖은 몸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타이어 같은 내 속에도 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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