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미학 19호(2018년 봄호) 수필미학 집중 탐구 - 최원현 - 지상 인터뷰
1. 문학 장르 중에 수필을 선택한 이유, 등단 계기와 과정
조실부모한 내 안에 잠재해 있던, 남들은 당연히 다 가진 것을 나만이 갖지 못한다는 것에서 오는 소외감 열등감 박탈감 그리고 자격지심은 어린 나에게 늘 큰 부담이었고 콤플렉스였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무언가로도 표현하여 나타내 보고픈 욕망이 있었으나 그 또한 생각만 앞섰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진주처럼 내 안에서 서정과 서사로 뭉쳐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걸 꺼내볼 여유와 기회가 없다가 그것들이 수필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밖으로 표출되었다. 시보다는 수필이 표현도 내 성향에도 더 잘 맞았던 것 같다.
내게는 문학에 대한 작은 기억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아무것도 모르는 채 특활시간에 문예반에 들어갔던 것과 중학생 때 경주까지 선생님과 함께 백일장에 참가했던 기억이다. 특별히 소질이 있었다기보다는 무언가 잠재된 것을 분출해 보고 싶다는 막연한 욕망 같은 것이 있었던지 초등학교 때는 웅변대회에도 나갔었고 큰 수상기록은 없었지만 나름 글쓰기는 내게 무언가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모도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하는 내게 세상은 만만치 않았고 늘 힘겨운 삶의 언덕을 오르내리며 스스로를 지탱하기조차 어려웠던 내게는 그런 기회조차 와 주지 않았다. 그런데 가정을 갖고 직장생활을 하던 80년도 중반 신문광고 하나가 눈을 끌었다.
문예진흥원에서 덕수궁 석조전에 문학 강좌를 연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보니 직장 근무를 마치고 가도 될 만한 시간이었고 거리도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마음 변하지 않겠다고 급히 등록을 해버렸다. 거기서 시인 성춘복 선생님과 수필가 서정범 교수님을 만났다. 원래 시를 쓰고자 했고 습작도 주로 시로 하고 있던 차라 시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시와 수필강의가 교대로 이루어지는 그곳에서 마침 수필 강의 시간에 서정범 교수님이 수필 한 편씩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나는 <봉숭아>란 글 한 편을 써서 내게 되었는데 다음 시간에 오신 서 교수님이 그걸 다시 주며 읽어보라 하셨다. 그리곤 봉숭아 대신 <발뒤꿈치>로 제목을 바꾸자시며 그걸《한국수필》이란 잡지에 초회(初回) 추천(推薦)을 하겠다고 했다. 초회가 뭔지 추천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나는 그렇게《한국수필》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조경희 선생님을 알게 되었고, 이철호 이숙 송도 선생님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책방 나들이>란 작품으로 추천 완료가 되면서 본격적인 수필가의 삶을 시작하였다. 그 후로 시 대신 자연스럽게 수필을 쓰게 되었고 그 세월이 어언 30년을 넘어버렸다.
2. 조실부모하고 외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특히 외할머니에 대한 수필이 많다. 외할머니로부터의 사랑과 이후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돌 달에 아버지를,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어버린 내게 외할머니는 그냥 어머니였다. 그럼에도 어린 가슴 속에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던 어머니의 빈자리가 있었고, 그건 나이가 들어가고 생각이 깊어가도 메꿔지지 않고 메꿀 수도 없는 큰 구멍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육이오라는 민족상잔의 아픈 상처가 누구에게나 자리하고 있던 너무나도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다른 사람의 사정을 살펴볼 겨를도 없을 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조부모님의 큰 그늘이 있어 시골인심은 부모 없이 외톨이로 외가에 사는 내게 너나없이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동란 중에 아버지를 잃고 뒤따라 어머니까지 잃은 아이의 삶은 어쩔수 없는 것이었을 것 같지만 내가 미처 모르던 그 어떤 큰 힘이 나를 보호하고 감싸주고 있었던 것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는 딸만 셋인 외조부모님의 맏이였다. 열여덟에 시집을 가서 스무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을 결핵으로 잃어버린 어머니는 당신마저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다시 얻은 나는 당신으로부터 완전격리해 버렸다. 그 어머니도 내 나이 세 살, 어머니의 나이 스물아홉에 내 곁을 떠났다.
졸지에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되어버렸지만 외가에서 태어났던 나는 그대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그리고 막내이모에 의해 길러졌고 그렇게 내 유년은 겉으로는 불행해 보였지만 안으로는 세 분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비교적 평안하고 따스한 유년기로 자랐다.
내가 입학하던 해 봄 막내이모가 시집을 갔다.(어머니의 바로 밑 동생인 큰이모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시집을 갔다.) 나는 그때부터 순전히 외조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아들이 없는 외조부모님은 작은할아버지댁의 큰 외숙을 양자로 들였다. 들였다기보다는 밀고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텐데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 외숙 네가 새로 지은 집으로 들어오면서 나에겐 위기가 왔다. 나를 내 피붙이랄 수 있는 큰아버지 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말 중에 ‘외손자를 이뻐하려면 경상도 방아 코를 이뻐하라’는 말이 있을 만큼 외손자는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할 때인데도 부모도 없이 자란 내가 피붙이라지만 큰아버지 작은아버지한테 어린 것이 눈칫밥 먹을 것을 생각하며 외조부모님은 급기야 큰 결단을 내리셨다.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봐야 들어가는 때라 광주로 목포로 유학을 못 가면 30리나 떨어진 유일한 중학교로 가게 되는데 여럿이 시험을 봤지만 나와 친구 하나만 합격을 했다. 외조부모님은 내가 중학교라도 나온 후에 큰아버지께 가면 조금은 더 마음이 놓이겠다 싶으셨는지 새로 지은 집을 양아들한테 물려주고 엄동설한에 학교가 조금은 가까워지게 한다고 산 너머 마을에 토담집을 지어 나 때문에 분가 아닌 분가를 하셨다.내가 중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그것도 한겨울에 집안 일가친척이며 동네 사람들까지 말리는데도 고집스레 이사를 나온 덕(?)에 나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다시 셋이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3년의 중학교를 마쳤다.
할머니는 혹여라도 당신이 세상을 떠나서 또 나만 남겨질까봐 전전긍긍 하셨다. ‘원현이 초등학교 졸업이라도 하는 거 보고 죽어야 할틴디’ ‘우리 원현이 중학교 졸업이라도 하는 거 보고 죽어야 할틴디’ ‘우리 원현이 고등학교 졸업이라도 하는 거 보고 죽어야 할틴디’ 내가 그리도 많이 들었던 외할머니의 주문 같고 기도 같은 그 노래는 어느 날부터는 당신의 희망가로 바뀌어 내가 결혼하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이 되었고, 결혼을 하게 되자 손주도 보고 싶어 했다. 그 기도가 이루어져 할머니는 외증손주 남매를 안아 보시고 여든일곱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일찍이 참판 댁 장손녀로 태어나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양반집 도령을 찾아 나주 임씨가로 시집을 간 것으로부터 어려움은 시작되었다. 바람처럼 떠돌길 좋아하는 남편에 아들 없는 딸만 셋인 아낙으로의 한도 한이지만 큰 사위 둘째 사위 셋째 사위까지 너무나 허망하게 잃어버린 데다 큰딸에 큰 손주까지 잃어버렸으니 그 황망함을 어디다 비길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두 딸의 아이들은 엄마라도 있지만 나는 그 엄마조차 없으니 그게 할머니에겐 더 눈에 밟히고 가슴에 사무쳤다.
내 수필 속엔 그런 할머니의 한과 안타까움에 조실부모한 내 빈 가슴의 서정이 어우러진 글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크게 감사한 것은 혹시라도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말 듣지 않게 하려 어려서부터 가혹하리만큼 이어졌던 외할아버지의 내 행동거지며 예의에 대한 교육이었다. 신발 벗는 것, 남의 집에 갔을 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앉는 위치며 인사하는 것, 앉았다 일어나는 것까지 수 없는 교육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뤄졌는데 그것이 내가 커서 그나마 사람들로부터 크게 눈 밖에 나지 않게 살아온 힘, 할아버지의 그 교육 덕택이 아녔나 싶다.
3. 문학 공부와 관련하여 영향을 주었던 사람이나 만남에 대하여
문학은 늘 내 꿈이었고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소망이었다. 하지만 삶은 나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어떤 일이든 내가 결정해야 했고 그 책임도 내가 져야만 했기에 나는 늘 신중했고 매사가 부담스러웠다. 그런 중에도 내 안에 잠자고 있던 감성이나 선천적이랄 수 있는 서정성들이 그나마 그런 나를 많이 편안하게 해 주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특활시간에 문예반에 들어갔는데 그 첫 시간에 시를 써온 학생은 공책을 상으로 받았다. 나는 잠깐 내 교실로 가서 한 편의 시를 써서 선생님께 내고 공책을 받았다. 처음으로 시란 것을 써 본 순간이었다. 그 선생님이 아동문학가 김관재 선생님이셨다. 그 선생님께 글짓기라는 것을 배웠다. 처음엔 공책에 눈이 멀었었다지만 무언가 쓴다는 것에 계기를 만들어 주신 분이 아녔나 싶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 선생님과 함께 경주로 백일장에 참석했다. 글솜씨가 특별히 있는 것도 아녔던 것 같은데 선생님과 함께했던 그 시간이 내겐 또 한 번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숙명 같은 발걸음을 떼게 했던 것 같다. 그 한솔 배봉수 선생님이 지지난해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사대를 나와 시골 중학교에 잠시 계시다가 전남여고에서 퇴직하셨는데 그 잠시의 인연이 나를 글쓰기로 인도해 준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이 있다. 70년대 말 내가 S산업에 잠시 근무할 때《감독자와 품질관리》란 잡지의 편집장으로 있던 (고) 정채봉 형인데 ‘전국 산업전사 문예작품 현상공모’에서 내가 대상을 받으며 알게 되어 속마음까지 나누던 사이다. 그는 나보다 손 위였지만 나보다도 마음은 더 여렸다. 엄마가 없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우린 그냥 통했고 샘터사에 취직이 되어 비로소 제대로 된 직장에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던 그는 책이 나올 때마다 사인을 하여 직접 찾아와 건네주고 가곤 했었다. 소설을 쓰고 싶다던 그가 동화로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동화만 쓰는 것을 안타까워하다가 성장소설《초승달과 밤 배》를 내고 좋아하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가 내게 시도 쓰고 산문도 쓰라고 했던 것도 내겐 문학의 큰 약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서정범 교수님과 조경희 선생님이시다. 두 분은 내 수필의 문을 열어주신 분들이다. 《한국수필》을 통해 수필의 길을 가게 해 주신 두 분도 지금은 다 아니 계신다. 또 하나 한국수필작가회다.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한 수필가들의 동인회인데 91년과 92년 나는 고동주 회장 이정원 부회장과 함께 그 회의 총무로 살림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후 오늘까지 문학을 해 오는 동반자로 큰 의지가 되어주고 있다.
4. 작년에 15권째 수필집을 상재 하였으며 지금까지 다수의 선집을 상재 하였다. 그에 대한 감회에 대하여
1995년 문예진흥원으로부터 창작기금을 받게 되었다. 그 기금으로 낸 책이《날마다 좋은 날》(도서출판 유정)이었다. 그리고 그 책으로 1997년 제5회 허균문학상을 받았으며 다음 해엔 제1회 서울문예상도 받았다. 1997년부터는 기독교세진회가 내는 제소자들을 위한 잡지 계간《새 생활 안내》에 ‘안으로 띄우는 편지’를7년간 연재 했는데 그 중 일부를《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2001)로 도서출판 내일에서 출판한 것이 문예진흥원의 첫 번째 우수문학 작품으로 선정되어《날마다 좋은 날》과 함께 전국의 모든 도서관에 소장되는 기쁨을 얻었다.
2002년에는 수필집《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범우사)를 출간했는데 이것이 또 문예진흥원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고 그것으로 제20회 한국수필문학상을 받았다. 2003년에는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선집146《숨어있는 향기》(교음사)를 출간했으며, 2004년에도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을 받게 되어 그 지원금으로《서서 흐르는 강》(선우미디어)을 출간했는데 그걸로 제20회 동포문학상 대상(2005)과 제23회 현대수필문학상(2005)을 받게 되었다. 그 해에 산문집 최원현의 맑은 이야기 샘《기다림의 꽃》(선우미디어)도 출간했다. 월간《건강과 생명》에 ‘최원현의 살며 생각하며’란 이름으로 8년간 연재했던 것을 모아 낸 것이《행복이 사는 곳》(라온누리)이다. 그리고 1999년부터 3년간《수필과 비평》에 원로작가 탐방을 연재했는데 그걸 모아 낸 책이《문학에게 길을 묻다》이다. 2017년에는 두 권을 냈다. 《내 향기 내기》(북나비)와 범우문고《누름돌》(범우사)이다. 《내 향기 내기》는 제36회 조연현문학상 수상작이 되었고, 《누름돌》은 제23회 신곡문학상 대상 수상작이 되었다. 이렇게 30년 동안 시집까지 하면 스무 권의 책을 냈고 좋은 상도 많이 받았다.
내 삶 속에 와 준 문학 그리고 문학과 함께 한 나의 삶은 그냥 문학이고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삶의 고비마다 보내주신 위로와 격려로 수필집과 문학상을 허락해 주셨고 나는 그 위로와 격려의 힘으로 다시 삶을 열곤 했다. 한 권 한 권의 책을 볼 때마다 그때 그때마다 나를 향해 내밀어 주시던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 내가 아니라 그분이 하신 거였다. 여리디여린 성정의 내가, 아무 의지가지 없던 내가 이만큼 살아오면서 문학이란 이름으로 나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분과 내 주위 수많은 분들의 사랑과 기도 덕이다. 특히 책을 낼 때마다 상을 덤으로 얹어 주시던 것까지 내 삶도 문학도 온통 사랑의 빚이다.
5. 수필에 대한 정의와 본인 작품의 경향에 대한 자기 분석
나는 수필을 ‘소금 꽃’이라 생각한다. 바닷물을 가두어 증발시켜 얻는 소금은 햇빛의 사랑을 얼마나 받는가에 따라 품질이 결정된다. 좋은 햇빛을 충분히 많이 받고 거기 적당히 바람이 도우면 소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금꽃을 피운다.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삶이라는 바닷물을 자기의 몫으로 끌어들여 가두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수분을 증발시키는 각고의 노력인 산고는 작가의 몫이다. 그냥 소금이 아니라 찬란한 빛을 내는 최고의 염도를 지닌 소금꽃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할 뿐 아니라 먹어보면 금방 그 진가가 구별된다.
수필은 작가가 자신의 삶을 소금꽃으로 피워낸 것이다. 하지만 내 작품들은 그런 소금꽃이 못 된다. 청탁에 쫒겨 하루쯤 더 햇볕을 받아야 하는데도 그리 못한 것이 대부분이고 더러는 좋은 날 좋은 바람을 기다리지 못해 못 만나기도 했고 내가 게을러 염전을 잘 살피지 못한 것도 많다.
제대로 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그나마 사랑해 준 것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너무나도 먹먹하고 참담한 일을 많이 당한 세대였기에 바로 공감대가 형성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작품은 깊이도 덜하고 구성도 알차지 못하다. 그저 여린 심성과 정이 많은 성정이 감성적으로 일궈낸 내 마음 밭의 작물들이다. 해서 늘 두렵기도 하다. 쉬 끓는 얇은 냄비처럼 짧고 작은 공감은 있어도 긴 여운 오래 남는 기억은 기대할 수 없다는 두려움도 있다.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려는 노력은 있지만 내 지식과 능력의 한계는 늘 나를 안타깝게 한다. 해서 늘 독자에게 미안하고 죄송하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다.
6.교과서에 다수의 작품이 실렸는데 그 의의에 대하여
나는 지금까지 수필집 12권, 수필선집 4권, 작가 인터뷰 1권, 문학평론집 2권 등 19권의 수필 관련 책을 냈다. 문예진흥원의 우수문학도서 선정이 3권, 문예진흥원 창작기금을 받은 것도 2건이고, 한국비평문학회의 2000년, 2001년, 2002년, 20006년을 대표하는 문제수필 선정을 비롯 중학교 교과서《국어 1》(비상교과서.2011)에 수필 <햇빛 마시기>가, 중학교 교과서《도덕2》(디딤돌.2011)에 수필 <기다림의 꽃>, 중국 동북3성《중학생 작문》(2009.연변교육출판사)에 수필 <행복한 책임감>이 등재 되었으며, 고등학교 교사지도서《문학》(천재교과서.2012)에 <기행수필의 맛과 멋 내기>, 고등학교《국어 하》(천재교육.2012)에 <수필문학의 특성>이 등재 되었으며, 대학수능 실전모의고사《언어영역》(메가북스.2010)에 수필 <땅 따먹기>, 대학수능 매가스터디《언어영역 문학 375제》(메가북스.2011)에 수필 <살아보기 연습> 등재 및 문제로 출제 되었다. 또한《한국의 좋은 수필》(2012.서정시학)에 수필 <어깨 너머>,《한국현대수필 75인선》(2012.미리내)에 <누름돌>,《한국현대수필 100년》(2014.연암서가)에 <내버려둠에 대하여>가 실렸다.
교과서의 작품은 모두 실린 후에야 알았다. 어떻게 해서 실렸는지도 모른다. 저작권료가 지불 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꼭 좋은 작품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단원의 주제에 맞는 작품을 고르다 보니 거기 맞아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것들이 어떻게 교과서 편집자의 눈에 띄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또한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처럼 마음이 여린 학생들에게 어떤 위로나 격려가 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글을 원하는 곳이면 가능한 다 주려고 한다. 신작이 아니라도 준다. 좋은 책, 나쁜 책이 어디 있겠는가. 어쩌다 독자가 우연히 그 책을 접하고 페이지를 열었는데 거기서 내 글을 만나 공감한다면 그게 어떤 책이든 나와 독자의 만남이 아닌가. 어디서든 내 글을 만나는 독자를 위해 내 글이 갈 수 있는 어느 곳이든 내 글은 갈 것이다.
오래전엔 메일을 받았었는데 도저히 살아갈 힘을 잃고 죽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우연히 친구네 집 화장실에서 내가 연재하는 잡지 속 글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단다. 글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수필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가는 글이라고 나는 자주 말하는데 그래서 내 수필은 여성적이란 말도 많이 듣지만 때론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그런 공감이 사람도 살리는 일도 한다고 생각한다.
7. 작품 속에서 주로 따스한 가족애를 많이 강조한다. 창작과정에서 염두에 두는 주안점이 있다면?
내 수필엔 가족 얘기가 많다. 그렇다고 가족애를 크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가족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절절히 느끼고 있기에 그냥 흘러나오는 것이고 그게 글 속에 깔려 있는 것이고 배경음악처럼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거나 구성에 넣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당한 햇볕과 바람이 소금꽃을 피워내듯 내 글 속에서 그런 향훈이 나도록 의도적인 몸짓만 한다.
한때 딸 이야기만 해서 핀잔을 받기도 했던 매원 박연구 선생이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들이 나 같은 딸을 가져봤나? 못 가졌으니 나같이 못 쓰지.” 얼마 후 딸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자 그때부턴 손주 얘기만 썼다.
수필은 삶이다. 삶이 변하면 수필도 변한다. 삶이 글로 나타날 때 현재 삶의 모습을 그릴 수밖에 없다. 강조가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내 최고 가치요 최고 중심사이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애정을 갖는 만큼 크게 보이고 깊이 보이고 많이 보인다. 마음이 움직이면 내 손은 그 지배를 받는다. 마음과 생각이 지시하는 대로 손은 그것을 쓸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내게 가족은 어린 날 내가 가져보지 못한, 내가 받아보지 못한, 내가 채워보지 못한 것들의 빈 가슴이다. 하니 특별히 염두에 둘 것도 없이 생각되고 품게 되고 그려지는 것일 뿐이다.
8.수필 창작 외의 저술과 문단 활동에 대한 회고와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은?
나는 1991년 한국수필작가회 총무(지금의 사무국장)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문단 일에 참여했다. 1996년에는 강남문인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사무국장 상임이사 부회장 회장 등을 맡아 20년을 함께 했고, 한국문인협회에는 1992년에, 국제펜한국본부엔 2000년에 가입했다.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수필분과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문인이라면 최소한의 문인단체에는 소속되어야 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먹고살기 위해 택했던 전공과는 달리 신앙과 문학으로 이모작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니 뱁새가 황새걸음 쫓다가 다리 찢어지는 시행착오도 겪는다. 근래 들어 몇 가지 욕심도 냈다가 건강을 이유로 다 접고 말았지만 문학 외적으로 문체부 지역문화진흥법 추진위원도 했고, 문화원연합회 문화동력연구소 연구위원도 했고 서울중앙지검 시민위원회 위원장도 했다. 그러면서 그런 경험들이 의외로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주었다. 내 수필도 내 안의 것, 내 경험칙에서 나온 것들에서 보다 세상을 보는 쪽으로 눈을 넓히고 싶다. 그 시대를 살며 그 시대에 대한 통감과 동참이 없다는 것도 수필문학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도 조금 더 눈을 열고 싶다.
9.수필계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과 바람직한 미래의 전개 과정에 대한 충언
우리 수필은 너무나도 개인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지 않나 싶다. 너무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들만의 수필이 아니라 무거운 주제도 살릴 수 있는 수필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또한 어린아이, 젊은이들이 공감하고 읽을 수 있는 동(童)수필, 청(靑)수필도 나왔으면 싶다. 인공지능 시대가 열리는데 우리 수필은 또 어떤 대응책을 갖고 있는가. 세상이 이리 급하게 바쁘게 돌아가는데 우리만 보통걸음으로 걷다 보면 다 앞서가 버리고 남는 건 우리만이지 않겠는가. 시보다 소설보다 깊이도 있고 재미도 있어서 읽고 싶은 수필을 우리 수필가가 써야 할 텐데 시인이 쓰는 수필, 소설가가 쓰는 수필이 수필가들이 쓰는 수필보다 좋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수필코너에 가봤더니 수필가의 수필집은 부끄럽게도 한 권도 없었다. 이를 어쩌면 좋은가. 그러면서 어떻게 수필을 쓴다고, 수필가고 말할 수 있는가. 부끄러워서 가만히 나오고 말았다. 무엇보다 젊은 수필가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문력 40년 50년이 거뜬한데 수필가는 6.70대에 등단하면 언제 얼마나 수필을 쓸 수 있겠는가. 또 순발력이 좋을 때 다 지나고 나서 글이 제대로 나오기는 하겠는가. 이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젊은 수필가를 발굴하고 생산해 내는 것도 우리의 몫일 것 같다.수필을 위해 한국 수필문단을 위해 우리 수필가들이 조금씩만 더 애정을 갖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좋은 글을 써서 수필이 변두리 문학이란 오명을 벗고 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했으면 좋겠다.
10. 특별히 보람 있었던 일, 후회되는 일 한 가지씩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감사하고 기쁜 것은 내가 70년대를 전후하여 문학공부의 스승으로 삼고 있던 범우문고에서 ‘범우문고 305‘로 내 수필집《누름돌》이 나온 것이다.
나는《누름돌》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그동안 교과서에도 대입 수능문제집에도 대학교재에도 내 수필들이 실렸고 권위 있는 좋은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범우문고로 내 수필집이 나온다니 그 기쁨을 도저히 억제할 수가 없다.’라고. 그러면서 ‘내가 범우문고에 각별한 애정과 감사를 갖듯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나의 문학 친구들에게도 이 수필들이 자신감을 주고 작은 용기와 격려라도 되었으면 싶다. 평생을 그래 왔지만 또 사랑의 빚을 지고 만다. 영원히 갚을 수 없이 쌓여만 가는 이 사랑의 빚을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이 수필들이 아주 작은 갚음이라도 되어주었으면 참 좋겠다. ’고 했다.
돌아보면 내 삶의 9할은 사랑의 빚이다. 내 삶 속에 함께 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전부이지만 그 사랑 안에서 또 수많은 사랑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아무도 눈여겨 봐 주지 않아 잡초처럼 버려질 수도 있던 삶을 잡초가 아니라고 무언가 될 거라고 우기며 뽑아버리지 못하게 하고 거름을 주고 흙을 북돋아 주며 가꿔주신 사랑들이다.
후회되는 일이라면 좀 더 많은 책들을 읽지 못한 일이다. 지친 삶터에서 돌아왔다지만 언젠가는 문학을 해야 할 걸 알면서도 좀 더 억척스럽게 훗날을 준비 못 한 아쉬움이 크다.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부족함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나를, 내 시간들을 투자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참 많이 나를 안타깝게 한다.
11.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
나는 나의 독자들에게 감사의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을 동시에 갖는다. 어줍잖은 내 글이지만 공감해주시고 사랑해 주심에 대한 감사이고, 좀 더 좋은 글로 독자에게 드리지 못함에 대한 내 한계의 부끄러움이다.
책을 낼 때마다 그런 마음이었고 그래서 다음번엔 좀 더 잘 해보겠다고 스스로에게 먼저 약속을 하곤 했지만 막상 그때가 되면 시간에 쫓기고 능력에 밀려 부도수표를 내곤 했다. 해서 그런 두려움이 몇 권 분량의 글을 갖고 있으면서도 묶어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미 알 만큼 알 것이어서 굳이 감추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는 내 모습이요 글들 아닌가 싶다. 이만큼 사랑해 주신 것만도 감사하고 감격할 뿐이다. 살아있는 동안 더 열심히 더 좋은 작품으로 독자의 사랑에 보답하겠다고 객기 같은 용기를 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