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三流) 수필가 / 신현식
“기업은 일류, 국가는 삼류!”라는 말이 있었다. 어느 그룹의 총수께서 말하여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었다. 정부가 하는 일이 오죽했으면 그런 말이 나왔을까.
이처럼 어떤 일이나 대상에 등급을 부여할 때 일류, 이류, 삼류, 이렇게 세 등분을 하곤 한다. 그러니 삼류란 최저 등급인 셈이다. 말하자면 낙제점을 받을 만큼 형편없다는 뜻이다.
정치나 기업만 등급이 있을까. 학교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문학은 어떤가. 당연히 등급이 있다. 문학성이 짙어, 감동, 깨달음, 재미가 있으면 일류가 되는 것이고, 조금 부족하면 이류가 될 것이고, 이도 저도 아니면 삼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장르는 또 어떤가. 시와 소설이 일류이고 수필은 삼류 문학으로 취급받는다. 상상에 의한 창조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다. 시, 소설을 고급의 문학으로 인정은 하겠으나 수필이 삼류로 취급받는 것은 야멸치고 가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필도 사실을 써야 한다는 대전제가 발목을 잡지만 얼마든지 상상을 가하여 문학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고민하지 않는 소수의 수필가가 문제인 것이고, 함량 미달의 작가를 마구잡이로 등단을 시키는 제도 또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수필인들이 각성하고 개선을 해야 하겠으나, 그러면 모든 수필이 삼류인가? 분명 그렇지는 않다. 문학성이 뛰어난 수필들이 수없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장르가 문제가 아니라 문학성을 얻지 못한 삼류 수필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일류라 자처하는 시나 소설은 삼류 작품이 없는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의미는 시인이나 소설가도 삼류 작가들이 부지기수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발견된다. 시나 소설이 삼류가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다. 허구로만 엮어지고 문학성도 없는 그것은 그저 허접스러운 쓰레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수필을 보자.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쓰는 것이기에 비록 문학성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이 녹아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글쓴이의 역사인 것이다. 수필은 비록 문학성이 부족하더라도 후대에 전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수필이 결코 허접스러운 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수필을 쓰는 것은 바로 이런 장점 때문이다. 머리가 맑은 날까지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 정진할 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성을 얻지 못해 삼류 수필가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럴지언정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 삼류 시인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