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먹는 라면은 별식이다. 라면을 끓이면서 달걀 한 개를 풀어 넣었다. 계란을 깨면서 옛 생각이 피어올랐다.
내 어릴 적, 시골집에서 닭을 길렀다. 스무 마리 정도를 밖에 놓아 먹였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요란스레 소리를 질렀다. “꼬꼬댁 꼭 꼬꼬댁 꼭꼭…” 동네방네 다 듣도록 숨넘어가는 듯 요란을 떨었다. 알을 낳았으니 챙겨가라는 신호였다. 녀석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부산했다. 앞뒤 재면서 울음을 조절하는 경우는 없었다. 정직한 고백이자 본능적인 몸짓일 터였다.
울음소리를 찾아가면 달걀이 있었다. 따뜻했다. 방금 낳은 달걀을 젓가락으로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쪼옥 빨아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혀끝에 감겨오는 맛이 고소했다.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달걀을 몰래 꺼내 먹는 어린 나를 암탉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 허락도 없이? 하는 표정이었다. 무참했다. 어머니에게 들켰을 때 보다 훨씬 더 미안했다.
새벽을 알리는 수탉 울음은 “꼬끼요오~ 꼬오~ㄱ” 길고 깊은 여운을 남기며 우렁찼다. 온 힘을 다해 운 다음, 가볍게 홰를 쳤다. 울음소리는 창끝처럼 새벽 하늘을 뚫고 멀리 멀리 날아가 세상을 흔들어 깨웠다. 기상나팔처럼 잠들어 있는 만물을 일으켜 세웠다. 외양간 송아지도 돼지 새끼도 온몸을 부르르 털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수탉은 새벽을 몰고 왔지만 암탉은 돈을 물어왔다. 지푸라기를 다듬어 달걀을 열 개씩 담아 한 줄을 만들었다. 계란 한 줄이면 제법 돈이 되었다. 선생님이나 어려운 분께 드릴 선물로도 손색이 없었다. 토종닭이 낳은 달걀은 양계장 알보다 비싸게 쳐주었다. 5일에 한 번 장이 섰는데 그 기간에 모은 달걀이 여러 줄이 되었다.
그렇게 모은 계란을 장에 내다 팔면 우리들 학용품 값은 물론 살림에도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암탉들은 대체로 지정된 장소에 알을 낳았다. 하지만 아무 데나 제멋대로 퍼질러 대는 놈도 있었다. 짚 더미나 갈퀴나무 더미, 혹은 헛간 으슥한 곳에 알을 낳아 놓은 경우였다. 심지어 알 낳은 장소를 오랫동안 알지 못해 알이 수북이 쌓여있기도 했다. 그건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 집 닭이 이웃집에 가서 알을 낳은 경우가 있었다. 울타리를 넘어가 일을 저질렀다고 닭을 나무라거나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닭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10년 전쯤 일이다. 오렌지글사랑에서 오랜 동안 함께 공부하던 한 아주머니가 다른 문학단체로 옮겨가더니 머잖아 등단을 했다. 마침 그 단체 송년모임에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축사를 요청받았다. 마이크를 잡은 김에 한마디 언급했다. “옛날 시골 우리 집에서 애지중지 기르던 암탉이 담장을 넘어가 남의 집에 알을 낳아버렸다. 닭이 한 일을 주인이 어찌하면 좋겠는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상황을 눈치 채고 박장대소했다. 딱 한 사람, 고개를 갸우뚱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분이 있었다.
라면이 다 끓었다. 냄비 뚜껑 위에 라면을 건져 묵은 김치 한 가닥을 걸쳐 먹는다.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정찬열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