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났더니 온 세상이 눈에 갇혀 꼼짝 할 수가 없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소금강 골짜기를 혼자서 한없이 걸어 올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힘에 겨워 눈 위에 벌렁 누워버렸다. 찬바람이 골짜기를 휘돌아 갔다. 한참 후, 가만히 귀 기울이니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누워있는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봄이 오는 소리였다. 눈이 쌓이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 같지만 어디선가 생명이 흐르고 있었다.
무거운 눈을 견디다 못해 등뼈가 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생각 하나가 머리를 쳤다. 벌떡 일어났다. 가자-아! 큰 소리로 외쳤다. 메아리가 골짜기를 울려 여기저기 눈발이 흩날렸다.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왔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렇지만 돈을 모으는 일이 마음처럼 그렇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5개월이 훌쩍 지났다. 답답했다. 졸업이 가물가물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걸어가는데 ‘주산학원’ 간판이 눈에 띄었다. 저거다. 시골 초등학교에 가서 여름방학 동안 주산 가르치는 일을 해보자. 당시 주산교육이 붐을 이루고 있었지만 읍 단위 정도까지만 학원이 진출해 있었다. 주산 1급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터라 방학 동안 아이들을 7급 정도 실력까지 가르쳐 낼 자신이 있었다.
당장 시골로 내려가 몇 학교 교장을 찾아갔다. 수강료는 학원의 절반, 방학 한 달 지도로 7급을 딸 수 있다니, 학교도 학부모도 대환영이었다. 그해 여름방학에 몇 개 초등학교를 순회하면서 아이들을 지도했다. 수강생이 많아 후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한 달 동안 아이들의 주산 실력을 예정대로 올려놓았고, 나도 필요한 돈을 얻었다. 학교를 졸업했다.
하마터면 학교를 중도에 포기할 뻔 했던 그때 일을 회상하며 혼자서 웃음 짓는다. 인간이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내가 내 안의 나를 찾아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해본다. 간절하면 보인다. 간절해야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개의 보물을 품고 있다. 내 안에 담겨있는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숨겨있는 값진 능력을 발굴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긁지 않은 복권에 그치고 만다. 갈고 닦지 않으면 빛을 볼 수가 없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9월. 책가방을 들고 교문을 들어서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