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울고 싶을 땐 울어라

울지 마라. 사내의 눈물은 동천지 하고 감 귀신 하는 것이다. 자라면서 어른들로부터 많이도 듣던 말이다. 그래서 살아오는 동안 울지 않으려고 늘 노력했다. 그런데 뜻밖의 시간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TBS 뉴스공장 금요음악 프로그램이 있다. 최근 가수 정미조를 초대하여 얘기를 듣고 노래를 듣는 순서가 있었다. 그녀가 ‘개여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 음악이 시작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노래를 듣고 울음이 나오다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작은 스튜디오 안에서 혼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가사 하나 음정 하나 표정 하나가 듣는 사람을 몰아의 경지로 인도했다. 프로다웠다.

“가도 아주 가지는 /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노래가 끝날 즈음 나는 주먹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노래를 들으면서 거기 스며있는 어느 한 인생이 내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노래 한 곡이 이렇게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녀석이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오래 살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고,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동을 얻기 위해서다. 로댕은 일찍이 “예술은 감동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고 갈파했다. 웃거나 운다는 것은 감동했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개여울’ 가사를 다시 곱씹어보았다. 소월 시답게 가사도 만만찮은 울림이 있지만, 나를 그토록 감동시킨 것은 천재적 감성으로 온 힘을 모아 울면서 노래 부른 가수의 열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울면서 부르는데 따라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가가 울면서 쓴 글은 독자가 울면서 읽게 된다. 울면서 그린 그림은 화폭 어딘가에 화가의 눈물이 젖어있다. 은박지 위에 그린 이중섭의 ‘황소’,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작품 앞에 서면 옷깃을 여미게 된다. 가난과 질병, 편견에 맞선 불굴의 용기와 예술 혼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은 영감을 통해 그렇게 소통하도록 되어 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감동할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먹고 사느라 바쁘고 힘들지라도 운전 중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울어도 보고, 어느 집 벽에 걸린 그림 앞에 오래 서서 얼굴도 모르는 화가와 대화를 나누고, 먼지 쌓인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읽으면서 웃고 울 수 있는, 한 뼘 정도 마음의 여유라도 가지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이 가을 초입에.

예술을 통한 감동도 중요하지만 실은 일상에서의 감동이 더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마음과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느 날 뜬금없이 커피 향으로 아내의 아침을 깨우는 남편. 출근하는 남편 옷에 묻은 보푸라기를 말없이 떼어주는 아내. 눈물 나지 않는가.

울어라. 울고 싶을 땐 울면서 살아라. 내 안의 어린 내가 나에게 가만히 들려주는 말이다.


정찬열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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