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유숙자
늦은 시각에 가까이 지내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초저녁에 큰아들 내외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았다며 기쁨에 들떠 있을 때와는 달리 착 가라앉은 음성이다. 아들이 결혼한 후, 처음으로 집을 사서 이사했기에 한달음에 달려가 보고 싶었으나 짐 정리되면 모실게요 하는 며느리 말에 전화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정성껏 만들어 두었던 퀼트 벽걸이를 선물로 준비했다. 지금쯤 손녀들의 재롱과 새집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워야 할 때인데 침통하기까지 한 친구 음성에 불안한 마음이 스친다.
아들 집에 가보니 언제 이렇게 여유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잘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 고급스러운 커튼과 카펫, 크림색 가죽 소파, 벽에 걸려있는 그림까지-. 참으로 알뜰하게 살았구나 생각하며 칭찬해 주려고 부엌으로 향했다.
“좀 거들어주랴?” 하고 부엌으로 들어서니 의자에 비닐도 채 벗겨있지 않은 낯선 식탁이 놓여 있었다.
친구는 아들이 결혼할 때 식탁을 선물했다. 살아가며 다른 가구는 낡으면 쉽게 버리게 되는데 식탁은 보를 씌우던지 유리를 깔아 놓으면 오래 쓰기에 애당초 크고 좋은 것으로 장만해 주려고 큰맘 먹고 산 선물이었다.
결혼 후, 조그만 사각 테이블을 놓고 사는 아들네는 손님이 올 때마다 식탁이 비좁아 불편을 겪었다. 친구는 며느리에게 선물한 식탁을 왜 쓰지 않는가 물었다.
“아파트가 좁아서요. 하우스로 이사 가면 그때 쓸 거예요.” 그렇게 말했는데, 며느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 식탁을 자신의 친구에게 주었다는 것을 오늘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당장에 필요 없는 물건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낭비라고 생각했어요.” 며느리 말에 할 말을 잃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사연을 듣고 보니 친구가 섭섭해할 만도 하다.
“젊은이들은 개성이 강해서 호, 불호가 분명 하잖아, 며느리의 말을 그대로 믿어 봐. 신세대들은 누가 주었다는 개념의 의미보다는 내 취향에 맞아야 하고 당장 필요치 않으면 버릴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고 말한 다더라.” 나는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을 위로의 말을 열심히 해 주었다.
이 경우와는 좀 다르지만 내가 경험한 몇 년 전 일이 생각난다. 작은아들 내외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처음 방문하던 날이었다. 영국에서 살 때 장만한 본차이나 홈 세트가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센스 있는 선물이 아주 좋아 끌어안고 방방 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자를 풀어보라고 권했다. 며느리는 예쁘게 포장되어 뜯기가 아깝다며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종이를 벗기었다. 환한 모습을 드러낸 본차이나를 보더니 며느리는 손사래를 친다.
“어머니, 이 선물 너무 부담스러워요. 가져가지 않겠어요. 저는 그릇을 잘 깨는 편이거든요. 코닝이 좋아요. 막 쓰기도 편하고.” 미국 며느리답게 현실적인 생각이다. 귀한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기쁨과 자부심은 하루를 채 넘기기도 전에 부담스러운 물건으로 며느리 앞에 놓여 있다.
“엘리자베스, 이 그릇은 매일 쓰는 것이 아니야, 명절 때나 손님 오실 때 사용하렴, 새살림 시작하며 좋은 그릇 한 세트쯤 있어야 하지 않겠니? 가져다 두면 필요한 때가 있을 거야.” 사정하듯 달래서 차 트렁크 속에 넣어 주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그릇은 장식장의 정물처럼 진열되어 작은아들 집에 갈 때마다 나를 반기고 있다. 그저 남에게 주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살아가면서 선물을 주고받는 기회가 많다. 선물은 특정한 예식을 위한 것이든, 평소 마음속에 고마움으로 남아있는 분들께 드리는 것이든 간에 고를 때 조심스럽다. 그것은 마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물하면, 내 가슴속에 잊히지 않는 감명으로 남아있는 오 헨리의 단편 ‘크리스마스 선물”이 생각난다. 너무도 가난했기에 시계를 팔아 아내의 빗을 장만한 남편 짐과 결 고운 금빛 머리를 잘라 남편의 시계 줄을 산 아내 델라는 우리에게 선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어 하는 정성 된 마음이 우리 삶을 넉넉하게 살찌우게 한다. 단맛을 내는 향기일 것이다. 설령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받는 것이기에 보낸 사람의 성의를 생각하고 고맙게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마음의 표시로 주어지는 선물, 사랑과 정성이 담긴 선물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