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밀라(Pamilar)

                                                                                                                                                          유숙자

아침 산책을 시작한 오래되었다. 말하기 좋아 산책이지 걷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른 아침이라 공기가 차가우나 걷기 시작하면 이내 몸에 훈기가 돈다. 매일 혼자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집집의 다듬어진 정원을 보며, 계절마다 색채가 변하는 앞산을 바라보며 걷기 때문이다.

 

초록 융단을 깔아 놓은 잔디가 유난히 부드러운 앞집 , 귀퉁이에서 작고 예쁜 꽃을 앙증스럽게 피워 올리는 등대 풀이 한창이다. 골목 중간쯤의 이층집은 지붕을 타고 오르는 핑크빛 부겐벨리아가 아치를 이루고 있어 로즈 퍼레이드의 장면을 보는 같다. 힘찬 새순을 빨갛게 뻗으며 장미꽃을 피워내고 있는 길모퉁이 집도 봄맞이가 끝난 정원이 말끔하다. 사계절의 구별이 뚜렷지 않다고 해도 봄은 3월이 되어야 친근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한창 자태를 뽐내며 피기 시작하는 갖가지 꽃들과 달리 이맘때면 시들기 시작하는 것이 동백꽃이다. 동백꽃을 보고 있으면 베르디의 비극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좋아하던 그레함의 상기된 표정과 맞물린다.

 

어느 봄날, 아침 산책에서 내려오는 길에 가장 먼저 봄을 맞은 노부부를 보았다. 이른 아침인데도 그들은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겨울 같은 쌀쌀함이 아니더라도 노인에게는 차가운 아침인데 겨우내 안에 있었던 답답함을 털어내고 싶어서일까? 햇살과 벗하며 한가롭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앞을 자주 지나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서로 마디씩 인사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들은 그레함과 파밀라 라는 70 부부이다.

 

봄비가 소리 없이 내리던 어느 , 풀잎에 맺혀있는 물방울 꽃이 하도 영롱해서, 물안개가 구름처럼 일고 있는 산허리에 펼쳐진 폭의 수묵화가 신비로워 감상을 곁들이느라 평소보다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날 파밀라 부부는 때문인지 현관 차양 밑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앞을 지나칠 파밀라가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같이하지 않겠어요?”

나는 특별히 바쁜 일도 없고 비가 오기 때문에라는 감상에 젖어 파밀라의 말에 끌렸다. 탁자에는 이미 꽃무늬 찻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노인들 삶이 그렇듯이 동그마니 집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매일 아침 자신들의 앞을 지나는 동양인을 만났으니 호기심과 반가움이 반반이었으리라. 그날 이후 가끔 타임을 가졌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별것 아닌 일에도 크게 감탄하며 매사를 흥미 있게 듣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몸에 탓인지 일상이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로 자식 이야기를 때는 눈에서 빛이 난다. 독일에서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아들 내외와 I Q 신동에 가깝다는 손자의 자랑이 대단하다. 아들네 이야기를 하는 날은 나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정도로 길게 이어진다.

 

파밀라 부부는 클래식 음악에 일가견을 피력할 정도로 전문성을 지녔다. 피아니스트인 파밀라 거실에는 입이 벌어질 만큼의 클래식 L P 벽면을 가득 채웠다. 나도 음악 하면 말이 많은 사람이기에 무궁무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는 곧잘 콘서트홀을 찾았고 주말이면 바비큐도 즐기며 돈독한 이웃 간의 정을 쌓아갔다.

 

그날도 아침 운동 끝에 파밀라의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주위에 동백꽃이 한창이라 꽃과 꽃망울이 잎사귀보다 많이 달린 것처럼 보였다. 동백나무 밑에는 많은 꽃이 떨어져 있었다. 동백꽃은 꽃잎이 지는 것이 아니라 꽃송이가 떨어지기에 모습이 애처롭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널브러져 있는 동백꽃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

동백꽃을 때면 베르디 비극 오페라 트라비아타 비올렛타 생각난다고 말하자 그레함이 자신도 라트라비아타 좋아한다며 원작소설 춘희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사춘기 소년처럼 여린 감상을 나타냈다.

 

해가 바뀌고 한동안 바빠 걷기 운동을 중단했었다. 신년 인사도 나눌 주말 하룻날을 정해서 파밀라 가족을 초대하려고 했는데 그레함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파밀라는 덩그렇게 집에 혼자 남아 주체할 없는 외로움과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곳 사람들은 타인 앞에서 웬만해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파밀라도 흐느끼지는 않아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안으로 삭이느라 애썼다. 아침 운동 때만이 아니라 틈을 내어 들리곤 했으나 말을 건네기가 조심스러웠다. 섣불리 위로한다고 상처를 덧들일 수도 있고 말의 위로가 사실상 효험이 없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조용히 곁에서 지켜보다 뿐이다.

날이 갈수록 파밀라는 말수가 적어지고 움직이는 것조차 싫어했다. 급격히 기억력이 감퇴하면서우울증세까지 보였다. 수십 개의 앨범을 뒤적이는 것이 일과 전부처럼 보였다. 아들이 독일로 모셔갈 뜻을 비쳐도 그래함의 추억이 있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파밀라는 점차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하루가 너무 길어 견디기 어렵다고 했다. 누구와 대화를 나누며, 누구를 위해 음식을 만들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욕을 잃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구심점을 잃은 것이다. 매인 곳이 없는 그녀가 갑자기 너무 늙어 보였다.

어느 날은 오전 시간을 머물다 오기도 하고, 즐겨 듣던 음악을 들려주고, 좋아하던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의례적인 고마움을 표시할 관심이 없다.

올봄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서 파밀라는 주로 거실에서 지냈다. 봄이 오면 커튼부터 산뜻하게 갈던 것조차 잊고 있는 듯싶었다. 묵직하게 매달려 있는 겨울이 그녀의 없는 지친 표정과 어울렸다. 날씨라도 화창해져서 뭔가 그녀의 심경에 의욕이 솟고 변화가 와야 텐데.- 이런 걱정을 하는 동안 파밀라의 우울증이 나에게 옮겨 왔는지 어두운 분위기에 차츰차츰 익숙해져 갔다.

 

며칠째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늘은 파밀라를 위해 준비한 날씨가 말끔히 개었다. 아침의 맑고 투명한 햇살이 푸른 이파리에 반사되어 진초록의 영롱한 빛을 발한다. 깨끗하게 단장된 앞산도 환한 얼굴로 의젓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산허리에 걸쳐있는 새털구름이 가볍고, 푸르다 못해 시리게까지 보이는 하늘이 희망처럼 시원하다.

왠지 오늘은 파밀라에게 좋은 일이 생길 같아 나는 평소보다 이르게 아침 운동을 서둘렀다. 그늘진 파밀라의 마음에 싱그러운 아침을 빨리 보여주고 싶어서. 청명한 하늘을 그녀 마음에 가득 안겨주고 싶어서. 우울과 무기력의 옷을 벗기고 밝은 햇살로 덧입혀 세상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레함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해 슬픔을 곱씹기보다는 50 동안 행복했던 시간을 추억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알찬 삶인가를 말해주고 싶다. 인생은 길지 않은 , 우리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영원을 향해 가야 하는 나그네이기에 길게 슬퍼하고 있을 겨를이 없음을 이야기해줘야겠다.

그녀의 얼굴이 전과 같이 밝고 화사한 모습이 되기 간절히 바라며 아침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힘차고 가볍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