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태닉 가든에서 찾은 마음의 안식

 

 

최숙희

 

미국 이민 후 자영업이라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일 년 365일 가게 문을 열고 닫으며, 은퇴를 기다렸다. 은퇴하면 모든 짐을 벗어 던지고 마냥 행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마주한 자유는 뜻밖에도 매일 무언가 특별하고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라는 또 다른 강박으로 다가왔다. 여행에 대한 갈증을 풀 듯 떠난 몇 차례 세계 여행도 그때뿐이었다. 돌아오면 다시 적막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집 근처 사우스 코스트 보태닉 가든 (South Coast Botanic Garden)’의 연간 회원권을 끊으면서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마침 남가주 하이킹 트레일에서 방울뱀 사고가 잇따른다는 기사를 읽은 뒤라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기도 했다. 과거 쓰레기 매립지였던 이곳이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울창한 숲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황무지 같은 이민 생활을 일궈낸 우리네 삶과도 닮아 있어 더욱 정이 갔다.

 

엘에이 북쪽의 데스칸소 가든이나 헌팅턴 라이브러리처럼 화려하고 압도적인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는 소박해서 더 정감이 가는 장미 정원과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선인장 가든, 그리고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게 하는 일본 정원이 있다.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절히 섞인 산책로는 당뇨 때문에 매일 일정 걸음 수를 채워야 하는 내게 더할 나위 없는 운동 코스다. 편한 운동화에 모자 하나 눌러쓰고 물 한 병 챙겨 가볍게 나설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다. 나무들과 호흡하고 나무 그늘 아래 잠시 쉬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 시간이 좋다.

 

어느새 벌써 네 번째 방문이다. 입장료를 따져보면 이미 본전은 뽑은 셈이다. 자주 찾다 보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계절에 따라 미세하게 변하는 나뭇잎의 색깔과 피고 지는 다양한 꽃들에 시선이 머문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과 흙냄새가 잠자던 오감을 깨운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을 길가의 들꽃 한 송이에도 걸음을 멈춘다. 뜻밖의 자연 공부를 저절로 하게 되는 셈이다.

 

산책길 벤치에 새겨진 기부자의 이름 중에서 한인들의 이름을 발견할 때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낯선 이국땅에서 치열하게 살아내고, 마침내 이 아름다운 정원의 한 자락을 채운 그들의 삶에 존경심이 생긴다. 언젠가 나도 이곳에 누군가를 위한 의자 하나 남기고 싶다는 소박한 상상도 해본다.

 

이제 나는 세계 지도를 펼치는 대신 산책로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다음번에는 돗자리와 간단한 간식, 그리고 읽다 만 책 한 권을 챙겨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은퇴 후의 삶은 특별한 사건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벗 삼아 숲길을 걷는 평범한 일상들로 완성되는 것임을 이 정원에서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