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하루종일 빈 시간을 마주한다.
남편이 떠난 후 차고문을 내리며 아, 이 느긋함. 하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방마다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고 테이블과 책상 위에 어수선하게 널린 컵을 치운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책을 책장에 꽂고 소파에 널린 옷가지는 옷장에 잘 건다.
오늘은 만사 잊어버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해야지.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 사람처럼 비장한(?) 다짐도 한다.
늘 해오던 일상에 내 허락과는 상관없이 휘젓고 들어오는 일도 있다는 사실은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겠지.
누군가의 딸이어서, 누군가의 아내여서, 엄마여서... 여기까지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어서 그 역할까지 감당해야할만큼 범위가 넓어졌다.
나를 끌고 가는 그 환경이 떄로는 힘들고 지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도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무엇'이라는 것은
참 귀하고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짙은 커피를 한 잔 들고 소파에 앉는다.
읽히지도 못한 채 뭉쳐져 있는 신문을 모두 모아 탁자 위에 쌓아두고
아이패드를 뒤져서 굳이 페르퀸트 조곡을 찾는다.
흘러나오는 '아침의 기분'에 푹 젖어보는 평화로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