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수록 아름답다
박진희
속이 아프다던 엄마가 사십대에 위암 판정을 받았다. 이웃 아줌마는 그것이 사형선고일 수 있다고 말했다.
“암에 걸린 엄마를 돌봐드려야지 대학원은 무슨 개뿔이냐!”며 맏딸의 의무를 다하라고 누군가 내게 다그쳤다. 그날 저녁, 넋이 빠져 있는데 청주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표를 예매했다며 서울에서 대학원에 다니던 동갑의 남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쳤던 아버지의 제자로, 집에 찾아온 적도 있고 대학시절에도 우연히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날 내가 청주에 있을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할 여유가 없었다. 난 정신없이 버스에 올라 창가로 몸을 던지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는 걱정이 되었던 듯 내가 거주하던 관악산 끝자락의 가파른 골목까지 따라 왔다. 침묵하고 싶은 나의 심정을 이해한듯 고맙게도 그는 말을 아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 이제 돌아가라고 하자 곱게 접은 쪽지를 내밀었다. 그의 뒷모습을 힘없이 바라보다가 희미한 달빛에 쪽지를 비춰보니 ‘아플수록 아름답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서울대 병원에서 위암 수술 중에 보호자를 찾기에 아버지와 내가 갔더니 수술복 차림의 의사가 그의 손바닥 안에 창백하게 쪼그리고 있는 푸른색의 살점을 보여 주었다. “다행히도 종양이 위벽을 뚫지 못했더군요.” 잘려 나온 엄마의 위 조각 중간에 오백 원 짜리 동전 크기 만한 부위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아니 요까짓게 엄마의 속을 수십년 동안 그리도 고통스럽게 했단 말인가. 황급하게 돌아선 그의 등에 대고 허리를 굽혀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난 대학원을 포기하지 않고 다녔고, 엄마는 몇 년에 걸쳐 혼자서 어려운 치료를 받고 25년을 더 사셨다.
십년 전에 엄마의 확실하지 않은 신경 질환이 악화되었지만, 이미 모국을 떠나 살던 나는 간호사로서 다른 아픈 이들을 돌봐주며 위안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년 후, 엄마를 잃고 눈물에 젖어 있다가도 환자들과 함께 할 때는 오히려 마음이 평안해지자 ‘아플수록 아름답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엄마들을 돌보면서 난 아직도 엄마가 살아있다는 착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들을 병원에 두고 혼자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이 세상에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조금만 아팠다가 말면 조금만 아름다운 걸까? 작은 아픔은 쉽게 아물지만 큰 상처는 오래 걸리기 마련인데,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삭혀지면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는 뜻일까? 만일 아픔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되게 커져서 죽음만이 해결책이라면 과연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우리는 사실 아픔이 동반되는 아름다움을 굳이 추구하며 살지는 않는다. 살아내다가 견디는 것이고, 그러다 치료가 되기도 하고 아니면 영원한 고통 속에 잠겨 있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픔을 통하여 굳건해 지며 내면적인 성숙에 이른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 더욱 높은 곳으로 전진해 나가길 바라면서.
돌이켜보니 ‘아플수록 아름답다’란 쪽지를 전해준 그 남학생은 나의 우는 뒷모습이 안쓰러워 아름답다고 위로해준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조개가 진주를 탄생 시키듯 고통을 겪으면서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래서 곁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하려 노력했고, 나 자신도 치유를 받으며 살았던 것 같다. 우연히 그가 철학교수가 되어 제자 양성에 힘쓴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의 많은 제자들에게도 내게 주었던 따스한 위로 그 이상의 가르침을 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들의 아픔에서 아름답게 성장하는 나날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늦게나마 그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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