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삼십 분의 기적 / 안경덕 - 2025년 고동주 문학상 본상
마당에 첫발을 디딜 때 하늘부터 우러러본다. 하늘의 근황을 읽는다고 할까. 아버지가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할머니의 건강을 살핀 것처럼. 나는 하늘을 점검한다. 하늘이 쾌청하면 상쾌하고 흐리면 차분해진다. 하늘의 색깔대로 마음이 흔들린다고 해야 옳겠다. 하늘도 제 마음 따라 청색, 보라색, 회색, 검은색으로 감정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 눈물을 흘리신다’라는 정호승의 시구가 있는 걸 보면.
찹찹한 흙 마당을 맨발로 한발 한발 떼면 눈은 ㄱ자 화단의 청청한 나무들에 쏠린다. 대문 가까이 수돗가를 기점으로 포도나무를 비롯해 꽝꽝, 동백, 앵두, 남천, 은목서가 가로를 차지하고, 세로엔 팔손이, 석류, 모과, 비파, 장미, 목련나무가 장독대까지 이어져 이중 담장 역할을 하고 있다. 식구 같은 나무들을 들며 날며 봐도 늘 새롭다. 날씨 따라 다른 세세하고도 풍성한 나무의 몸짓이 가슴에 나붓하게 안기기 때문이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하늘도 나무도 마찬가지지만, 하늘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다. 나무는 사람과 동격이라면 어떨지. 폭염에 지치고 한설에 떠는 나무가 인생이 겪는 시련과 흡사하므로.
유행 바람이 몰고 온 맨발 걷기에 흙 마당 밟을 생각은 미처 못 했다. 그전에는 걷기 운동할 땐 반드시 한두 명의 지인과 함께 라야 된다는 고정관념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어느 날 그 끈을 아주 놓아 버리고, 나 혼자 대중교통을 두 번씩 환승해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의 황톳길만 고집했다. 주 두세 번씩 넉 달을 부지런히 다녔다. 하지만 추워졌다는 이유로 슬슬 개으름이 발동했다. 처음 그 열정이 짚불처럼 사그라들고, 굳힌 의지가 삭은 나뭇가지처럼 뚝 꺾이고 말았다.
그래선가 지난 연말부터 몸살감기로 시작해 몸 여기저기 탈이 났다. 그중에 오랫동안 마른기침에 시달렸다. 한 달 건너 감기가 두세 번 든 데다 코로나가 겹쳐 기침이 더 심해졌다. 폐기능검사까지 하고 주사 치료와 약봉지가 늘어나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바닥 난 면역성이 박 바가지 깨지듯 박살 난 후에야, 기력을 회복할 돌파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연치유의 효과가 큰 맨발 걷기에 다시 적극 나선 게 바로 우리 집 마당 밟기다. 현관 앞 화단을 낀 흙길이 가로로는 손수레 두 대가 마주 보고 지날 넓이고, 세로엔 겨우 한 대가 다닐 넓이다. 길이라야 스무 서넛 발자국 된다. 장독대까지 가는 길을 보태면 여 남 자국 더 되나 무거운 징검돌이 듬성듬성 단단하게 박혀 있다. 몇십 년 동안 제구실한 돌을 들어내는 건 내 이익만을 따져 내치는 것 같고, 시멘트 사각진 징검돌에 까만 반디 돌의 앙증맞은 꽃잎 문양이 마음을 붙잡아 그냥 뒀다. 수없이 밟힌 문양이건만 반지르르한 빛이나 돋보인다.
그동안 내가 윤기 흐르는 무성한 나무의 이파리와 화사한 꽃과 열매에만 반해 정작 흙은 등한시했다. 나무가 싱그럽게 자라도록 뿌리를 내리게 하고, 칼바람과 비바람에도 버티도록 붙잡아 준 게 흙이다. 토양과 나무는 바늘과 실 같은 존재다. 한없이 겸손하고 베풀기만 하며 변덕 없는 게 흙만 한 것이 또 있던가. 거기에 예사 흙인가. 수천 년의 역사와 햇빛과 달빛, 구름과 비, 바람이 차곡차곡 쟁여진 흙이다.
마당 밟기를 두어 달 했을까.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착용했던 허리 복대를 안 하고 밥을 지었다. 남편 점심 도시락을 싸고 출근시킨 후 나 홀로 식사한다. 설거지까지 끝내려면 두 시간 반 정도 바지런을 떠는 셈이다. 전에는 이 일을 마치고 방에 바로 누워 전기요나 원적외선으로 허리 통증을 이완시켰다. 이젠 연달아 삼십 분간 마당을 밟는다. 덕분에 그 악습관도 탈피했다. 또 몇 달 지나고 오랫동안 한 마른기침도 거짓말처럼 슬그머니 멈추었다. 정기적으로 온 감기도 소식이 깜깜하다. 잠자리에 들어 간절히 청하면 청할수록 멀리 도망가던 잠도 퍼뜩 든다. 모두 하루 삼십 분의 접지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리라.
포실한 흙이 온갖 생명의 터다. 촉촉한 흙 마당엔 붉은 지렁이가 꿈틀거리고 몸 낮춘 달팽이도 보인다. 애벌레와 자벌레, 개미와 이름 모를 생물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나무가 친구 인양 화단 언저리를 맴도는 하루살이, 파리, 모기도 나를 알은체 하는 눈치다. 해충이 밉지 않은 것도 흙 사랑에 빠진 덕일성싶다. 거기다 무직한 마당이 세상 근심 다 받아주어 응석까지 부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는다. 비좁고 작은 마당에서 제자리걸음이라 할 걸음을 물레방아 돌 듯 몇십 번 돌고 돈다. 지푸라기처럼 푸석해진 내 심신을 다지는데 아주 적절하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산, 바다, 강처럼 사방이 확 트인 풍경은 없지만 이나마 흙을 밟는다는 의미 하나만도 감지덕지다. 옹졸한 내가 만물을 껴안는, 너그러운 흙을 한 번이라도 닮아 봤으면 하는 마음도 자주 들게 해 주는, 가슴에 볕살을 지니게 해 주는 마당이 절친한 벗만큼 포근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생명이 숨 쉬는 흙의 기운으로 삶을 영위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테다. 삼라만상 우주가 흙이 모태다. 몸의 활성산소를 정화해 주는 접지야말로 건강에 진정한 명약 역할을 해 준다고 하면 안 될까. 흙은 모든 생명의 먹거리를 품고 있지 않은가. 각종 뿌리채소부터 곡식, 과일, 약재로 쓰는 자잘한 열매의 수확도 또한 흙의 공덕이 크다. 그러고 보면 강과 바다의 테두리도 땅이 아닌가. 갖은 어패류와 해물류의 먹거리도 안태 고향이 흙인 셈이다. 아니 흙 그릇 속이 만물의 산실이다. 세상에서 흙 그릇만큼 더 큰 것도 없지 않겠는가.
오래전 이 집을 설계하여 지은, 먼저 살고 간 이가 협소하나마 흙 마당을 만든 것이 새삼 고맙다. 철 따라 새소리와 매미 소리, 귀뚜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온갖 새와 벌과 나비가 춤추며 날아드는 마당이 있는 게 만분다행이다. 아파트로 입성 못 한 뼈저린 후회가 조금씩 덜어진다. 흙의 묵묵함에 든, 한결 한 심의 뜻을 본받아 진득하게 마당밟기를 해야겠다.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화단에 나른하게 누운 고양이도 나를 응원해 준다. 흙 마당은 안온한 고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