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언어학 / 허정진

 

 

패스트푸드점에 가끔 간다. 나이가 들어선지 아무래도 낯설고 불편한 장소인 것이 사실이다. 무인주문기 사용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주문받는 젊은 친구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웅얼웅얼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입도 벌리지 않은 채 복화술처럼 말한다. 노화된 청력 때문인지, 전문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번 요점을 놓치고 만다. 마지못해 되물으면 똑같은 말투로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사실은, ‘나이 든 사람이니까 말을 좀 천천히,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해주면 좋겠다.’라는 요청인데 이해를 못 한 것인지, 관심이 없는 것인지 그런 것쯤 아랑곳없다.

그럴 때마다 덜컥 서러움이 앞선다. 어쩌다가 벌써 늙어서 세상 물정과 감각도 무뎌진 노인이 되어버렸나 자책을 한다. 늙어서 무시당한다는 기분 이전에 세상밖에 멀리 떨어진 것 같은 소외감과 무력감이 몰려온다.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이해도 하지 못한 채 지레짐작으로, 눈치껏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가 스스로 안타깝다. 남의 말을 혼자 유추해 때로는 동문서답하는 자신이 계면쩍고 안쓰러울 때도 있다.

말을 주고받는 이유는 소통을 위해서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 좋은 의도, 좋은 목소리를 가졌어도 의사전달이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말투나 표정, 손짓, 발짓, 눈짓, 자세, 옷차림 등 비언어적 기호들을 사용하는 이유도 더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다. 상대가 내 말을 알아들어야 이해와 교감도 가능한 일인데 내 할 말만 다 했다는 식이면 허공에 내뱉는 소음과 다를 바가 없을 것 같다.

말이란 자기의 생각을 소리로 전달하는 수단이다. 제한된 어휘 내에서 가장 잘 들어맞는 단어를 골라 사용한다 해도 전달에는 늘 부조화가 발생한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직업과 나이, 거주지역 등에 따라 집단문화의 차이가 있다. 개인적인 가치, 정서, 관습, 학습, 정보 등에 따라 받아들이는 우선순위가 다르고 이해나 인식의 비중에도 차이가 있다. 유머를 유머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웃음 코드가 서로 달라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그러한 사실을 간과한 채 상대방도 자기와 똑같은 줄 착각하는 데 있다.

나는 농담으로 한 말이지만 상대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기도 하고, 격려나 조언에서 한 말들이 유세나 간섭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염화시중처럼 말이 없어도 마음과 마음이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소리 공양한답시고 말이 너무 많아서 소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무심코 뱉은 한마디 말 때문에 서로 간에 오해와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성의를 보인다는 것이 잔소리가 될 수도 있고, 상투적인 위로가 때로는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돌아보면 나부터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소통이 안 되면 상대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먼저 트집부터 잡았다. 주의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지 의심부터 하려 들고 답답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거나 속으로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내가 다 알아듣고 있는데, 내가 하는 말을 왜 못 알아듣느냐고 다그치며 거들먹거리지 않았나 모르겠다.

상대가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은 결국은 내가 말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이해하기 쉽게 말하지 않고 내 기준으로, 내 방식으로만 이야기해서이다. 본심을 숨기고 왜곡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빗대어서 말하는 때도 있었다. 말에 요점과 두서가 없거나, 부정확한 발음이나 음절이 불분명한 말투가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소통 장애의 원인은 상대에 대한 무관심과 무성의, 무례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남의 말이 알아듣기 쉬운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잘나고 이해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위해 알아듣기 쉽게, 요령 있게 이야기를 해서이다. 이야기 주제를 미리 언급하고 말을 꺼낸다거나,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한다든지, 요점을 간결하게 표현한다든지, 못 알아들으면 다른 용어로 바꾼다든지 성의와 배려를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것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내가 하는 말이 어려워 혹시 되묻지나 않았는지, 내가 하는 말이 아리송해 불편하지나 않았는지, 밑도 끝도 없는 유행어나 막무가내로 줄임말을 남발해 당황하지나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같은 말을 하여도 그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어느 소설에 나온 이야기다. 퇴근한 남편에게 아내가 당신 요즘 회사에서 점심은 뭘 먹느냐고 묻는다. 설렁탕이나 비빔밥이나 육개장, 뻔한 일인데 그게 뭐가 중요한 일이냐고 남편이 화를 내며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아내는 남편의 섭생을 생각해 균형 있는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물었던 것이다. 둘 다 잘못은 없다. 다만 의도를 먼저 표현하고 내용을 물었다면 그런 오해는 없었을 것을, 말보다 소통과 교감이 문제였다.

내가 만든 소리는 나의 언어가 되어 완성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그가 듣고 싶은 말, 내가 하기 쉬운 말보다 그가 알아듣기 편한 말이 어떨까. 거기에는‘말’에 앞서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먼저다.

profile